민낯 같은 순수함을 모으다, 처음책방 대표 김기태 교수 [인터뷰]

창간호·초판본의 가치에 눈을 뜨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던 김기태 교수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출판사 편집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지 몸소 체득하며 책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 그렇게 만든 책이 세상에 나와 독자의 손을 거쳐 헌책방으로 다시 나오는 과정이 너무 짧아 아쉽기도 했던 젊은 편집자 김기태는 그때부터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시 가슴속 로망으로 품고 있던 월간 ‘뿌리 깊은 나무’의 창간호를 만나게 된다.
“1976년 창간해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갑작스럽게 폐간된 잡지입니다. 우리 세대에겐 교양인이라면 응당 봐야 할, 수집하는 것이 도리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그 귀하디 귀한 잡지의 창간호를 보게 되다니 너무 신기한거죠. 더 놀라웠던건 당시 헌책방 주인이 그 가치를 알고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더군요. 그의 태도를 보고 창간호와 초판본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나도 기회가 되면 저런 것들을 모아보리라’ 마음은 먹었지만 박봉인 편집자 월급으론 여력이 없었다. 그런 그의 소망이 이뤄진 것은 저작권 관련 강의를 하기 위해 시간강사를 병행하면서부터다.
“직장생활을 하며 대학원 공부를 병행했는데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저작권을 공부해서인지 전국으로 강의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렇게 지방으로 강의를 가는 날에 오전부터 야간까지 수업이 많이 잡히거든요. 공강 시간마다 그 지역 헌책방을 드나든 것이 지금 이 보물창고의 시초입니다.”
전국을 누비며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단행본의 초판본과, 각종 정기간행물의 창간호를 수집할수록 구비해야 할 책 목록이 쌓여만 가는 것을 느꼈다. 구할수록 눈이 떠지고 욕심이 생겨 갖고 싶은 책이 꿈에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신중하게 책을 들였다.
김 교수는 아무리 희귀한 책의 초판본과 창간호를 발견해도 자신의 기준, 즉 깨끗하고 완전한 책이 아니면 손을 대지 않았다.
“초판본 자체가 귀하기 때문에 덥석 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기준 이하면 사지 않았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으면 보관이 더 힘들고, 그렇게 모은 책은 큰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을 얻기 위해 발품을 한두 번 팔아서는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갔어도 아니다 싶으면 포기하고 돌아서는 게 다반사였죠.”
그렇게 자신만의 기준이 뚜렷한 수집가였지만 원하는 책을 만나면 과감하게 구입했다. 제일 큰 금액을 준 책은 어느 정도인지 묻자 “오래전 두세 달 치 월급을 한 권에 썼다”며 본인 스스로도 과감했다고 웃는다.
김 교수는 “그때 구한 그 책이 지금은 더 큰 돈을 줘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뛰었다”며 “그때 사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6만여권의 ‘첫 책’이 갖는 의미
그렇게 빠진 이를 채워 넣듯이 눈앞에 아른거리던 초판본과 창간호에 대한 욕심이 조금씩 사라진 것은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책들을 이곳 처음책방에 모아놓은 후부터다.
“막상 이런 공간을 만들어 펼쳐놓고 보니 이 책들한테 너무 미안했습니다. 하나하나 어렵게 구한 소중한 책들인데 신경을 너무 못 썼어요. 새로운 것에 욕심내지 않고 있는 책에 잘하기로 마음을 내려놨습니다.”
실제로 서점 한 구석엔 풀다가 자리를 잡지 못한 책들과 아직 펼쳐놓지도 못한 초판본과 창간호 상자가 쌓여 있었다.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한 초판본일수록 김 교수 개인뿐 아니라 우리나라 출판계에도 큰 의미가 있는 자료들이었다.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최고의 장편소설은 최인훈 선생의 ‘광장’, 단편작품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손꼽히는데 이 두 작품의 완전한 초판본을 구하려고 참 많이 애쓴 기억이 납니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2쇄본 까지는 금방 발견했는데 1쇄는 쉽지 않았고요.”
문학사에 길이 남는 작품들마다 초판본이 품고 있는 사연도 다양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특별히 소중한 책, 애착이 가는 책은 꼽을 수 없다고 손사래 쳤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지만 가장 난감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정말 하나같이 다 귀하고 특별하거든요. 지금도 초판본을 구하러 오는 수집가들을 대할 때면 때때로 팔고 싶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잘 쓰일 것을 알기에 미련 없이 책을 떠나보내곤 합니다. 원하는 책을 구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간절함이 곧 제 마음이기 때문이죠.”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책 만드는 일을 했고, 1996년 한국 출판평론상을 수상하며 우리나라 공식 1호 출판평론가로 ‘서평’의 틀을 만들며 많은 글을 썼다. 우연한 기회에 대학원에서 뉴미디어와 저작권 보호를 공부하며 석·박사를 했고 2001년 교수로 부임하기까지 그 과정엔 늘 ‘책’이 있었다.

“제가 해 온 대부분의 일이 책과 관련이 있었고 직접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책 한 권 만들기까지 수없이 들여다보면서 수정하지만 막상 책이 나오고 나면 희한하게도 실수가 나타납니다. 근데 그 실수, 오탈자, 오류가 바로 초판본의 매력이에요. 민낯같은 순수함은 초판본에만 있습니다.”
그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자신의 취향이 응집돼 있는 처음책방을 놀이터 삼아 하루 종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더 이상 책에 대한 욕심도 없고 일을 벌이고 싶지도 않지만 갖고 있는 책을 어떤 방식으로든 데이터베이스(DB)화할 수 있길 희망한다.
“제가 갖고 있는 자료를 개인에게도 판매하지만 저는 이 책들을 어떻게든 살려내 모두가 볼 수 있는 출판자료로 만들고 싶습니다. 우스갯소리로 그 과정은 ‘이제 국가와 민족이 나서줘야 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 책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데이터로 축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요.”
김 교수는 편집자로서, 교수로서, 출판평론가로서, 초판본을 수집가로서 책에 둘러싸여 살아온 삶이지만 이젠 “읽고 싶은 책만 읽을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좋아하는 책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공간에서, 읽어야 한다는 중압감 없이 독서하는 요즘이 즐겁습니다.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처음책방’ 공간을 더 잘 가꾸고 싶습니다. 누구든, 언제든 원하는 ‘첫 책’이 있다면 마음 편히 문을 두드려 주세요.”
조혜정 기자 hjc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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