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고 누려라, 슬픔도 기쁨도 다 지나가니 [.txt]
힘든 일은 ‘겪고’ 좋은 일은 ‘누리고’
희로애락 경험하지만 체험은 제각각
미래엔 ‘기쁨/슬픔 체험실’ 등장할까

감정을 나타낼 때 쓰는 대표적인 동사는 ‘느끼다’이다. 물론 ‘느끼다’는 감정뿐 아니라 감각이나 깨달음, 인식을 표현할 때도 쓴다. 그 밖에 ‘겪다’와 ‘누리다’도 있다. 그런데 둘은 쓰임새가 다르다. ‘겪다’는 주로 슬픔이나 아픔처럼 부정적인 감정, ‘누리다’는 기쁨이나 행복처럼 긍정적인 감정과 짝을 이룬다. ‘겪다’는 기본적 의미가 ‘어렵거나 경험될 만한 일을 당하여 치르다’라서 ‘고통, 난리, 시련, 불편, 어려움, 시행착오’ 등 곤란한 일에 붙으므로 ‘행복/기쁨을 겪다’는 어색하다.
대개 ‘겪다’는 일을 당하여 치르는 수동성이고, ‘누리다’는 마음껏 즐기거나 맛보는 능동성이라는 점도 다르다. ‘겪다, 경험하다, 당하다, 고통받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πάσχω(파스코)에서 파생한 파토스(πάθος)도 격정, 열정, 노여움 따위의 일시적인 정념의 작용을 일컫는다. 이 말은 sympathy(심퍼시: 동감, 호감, 동정), antipathy(앤티퍼시: 반감), empathy(엠퍼시: 공감, 감정이입) 등 영어를 비롯한 여러 유럽 언어에서 감정 관련 어휘의 구성 요소다. 라틴어 patior(파티오르: 고통받다, 겪다, 당하다)의 파생어 passio(파시오: 수난, 수동, 열정, 격정)의 관계도 비슷하다. 능동성을 지닌 실천이나 이성과 달리 감정의 작용은 이렇듯 수동적이라고 여겨졌다.
한국어 ‘겪다’에 해당되는 영어 go through(고 스루)도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대개 고난이나 슬픔과 이어진다. ‘격정, 열정’을 뜻하는 독일어 Leidenschaft(라이덴샤프트)도 동사 leiden(라이덴: 고생하다, 당하다, 견디다)에서 유래하기에 앞서 말한 그리스어나 라틴어 어휘와 의미 과정이 비슷한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말은 go through처럼 ‘지나가다’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감정은 우리가 그 안을 통과하며 지나가는 것이라 풀이할 수도 있겠고, 시간이 흐르면 지나가는 것이 감정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감정은 정신의 본질로 간주되지 않았다.
수동성과 능동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겪다’는 ‘경험’, ‘누리다’는 ‘체험’에 대응될 수도 있다. ‘체험학습’의 경우처럼 교육 또는 여가를 목적으로 하는 ‘전통 체험, 농촌 체험’에서 ‘체험’ 대신 ‘경험’을 넣으면 어감이 달라진다. ‘체험’은 인위적인 환경에서 주도적으로 재밌게 즐기는 것인 반면 ‘경험’은 재미 유무와 무관하게 외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또 체험은 즉각적이고 다소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반면 경험은 지속적으로 쌓이며 서로 물려주고 주고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희로애락을 경험한다는 점은 같아도 각자 체험하는 바는 다르다. 한·중·일에서 경험(經驗)과 체험(體驗)의 구별은 독일어(Erfahrung/Erlebnis)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독일어의 영향을 받은 여러 유럽 언어에서도 이렇게 체험과 경험이 따로 있으며, 튀르키예어와 히브리어도 둘을 구별한다. 물론 언어마다 용법이나 어감은 조금씩 다르고 반드시 칼로 무 자르듯 나뉘지는 않는다.

유럽 언어 가운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경험과 체험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는 ‘체험’을 철학 용어로서 구별할 때 lived experience(리브드 익스피리언스)로 옮긴다. 한자어 ‘체험’은 ‘몸 체’(體)를 쓰는데 다른 유럽 언어들은 독일어 Erlebnis(에를레프니스: 체험)에 있는 leben(레벤)을 따라 ‘살다’를 뜻하는 말에서 만들었다. 스웨덴어(upplevelse·우플레벨세), 스페인어(vivencia·비벤시아), 헝가리어(élmény·엘메니), 튀르키예어(yaşantı·야샨트)가 다 그렇다. 영어 life(라이프)와 어원이 같은 독일어 Leib(라이프)가 ‘몸’이니 體驗(체험)은 의역으로서 원어의 어원과도 이어진다.
독일어 Erfahrung(에르파룽: 경험)은 자생한 말이거나 라틴어 experientia(엑스페리엔티아) 및 그리스어 εμπειρία(엠페이리아)의 번역 차용일 수도 있다. 이 말들은 모두 인도유럽어 어기(語基) *per-(페르: 지나, 건너)를 포함하는데 독일어 erfahren(에르파렌: 겪다, 경험하다)의 어근인 fahren(파렌)이 ‘가다/지나가다/운행하다’를 의미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경험’의 經(경)도 ‘경과’나 ‘경력’에서처럼 ‘지나다’를 뜻한다. ‘체험’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переживание(페레지바니예)는 접두사 pere-(페레)가 앞서 말한 인도유럽어 어기 *per-에서 나왔다. 이 말은 불안이나 걱정을 일컬을 때도 많은데 ‘겪다’와 비슷하게 주로 부정적 감정 상태를 겪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뜻이 확장됐다고 봐야겠다. 이 말 앞에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 со-(소)가 또 붙으면 함께 체험, 걱정하는 ‘공감’을 일컫는다.
인도유럽어 ‘지나가다’의 뜻에서 ‘(시련을) 겪다, 시험하다’의 라틴어 experior(엑스페리오르)가 생겼고, ‘위험’을 뜻하는 라틴어 periculum(페리쿨룸, 영어 peril(페릴)), 독일어 Gefahr(게파르), 스웨덴어 fara(파라)와 더불어 영어 fear(피어: 두려움)도 이와 어원이 같다. 경험(經驗)과 시험(試驗)의 ‘험’은 한자까지 같고 위험(危險)도 공교롭게 똑같이 ‘험’이 들어간다. 물론 어원적 관련성을 단정할 수 없으나 두 글자의 성방(聲旁) ‘첨’(僉)은 같고 유럽 언어를 통해 생기는 연결고리도 흥미롭다.
감정 체계는 인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마치 날씨처럼 기쁨이나 슬픔, 분노 같은 특정한 감정 상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포유류나 조류처럼 척추동물들에게도 있는 감정이 이성보다 먼저 생겼으며, 20세기 들어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에서 밝혀냈듯 감정은 그저 이성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고 서로 얽힌 관계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듯이 기쁨만 있어야 좋고 슬픔은 없어야 좋은 것이 아니며,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할 줄도 알아야 온전한 인간이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생길 위험을 극도로 줄이려다가 감정의 경험이 거의 사라진 미래의 인간들이 ‘슬픔/기쁨 체험 시설’을 찾아가지는 않을까.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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