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존재, 우주의 최종 열매인가 계급적 주체인가 [.txt]
제국주의와 파시즘 짙게 드리운 일제 강점기
철학자들, 시대 질곡 헤쳐나갈 ‘신인간’ 제시
동학과 마르크스주의, 인간존재 둘러싼 철학 논쟁
김형준, 마르크스주의 흡수해 동학 새로이 펼쳐

현대 한국 철학(현대라는 맥락에서 한글로 전개된 철학)은 일제 강점기에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현대 한국 철학의 탄생 설화에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이라는 배경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당시 주요 한국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에는 이 같은 상황을 타파하려는 방향성이 뚜렷했다.
이러한 방향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한 주제어가 곧 ‘신인’ ‘신인간’, 즉 새로운 인간이다. 당대의 여러 철학자는 인간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남으로써 시대의 질곡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야뢰 이돈화는 ‘신인철학’에서 한울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제시한다.
야뢰는 한울을 ‘지기’(至氣)로서 파악했고, 지기를 “유일한 생명의 충동력”으로서 개념화했다. 야뢰의 인간존재론은 이 한울형이상학에 근거한다. 목적론적 진화론을 배경으로 한 정신형이상학에 입각해, 야뢰는 인간을 한울 진화의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우주의 과실(果實)”, 즉 우주의 최종적인 열매이다. “지기의 생명력이 가장 찬연하게 나타난 것이 인간의 정신 현상”이며, “지기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생명체로서, 그 생명체의 중심이 양극으로 흘러 생리적 현상이 되고 음극으로 흘러 정신적 현상이 된” 것이다. 인간은 지기의 잠재력이 극한으로 발휘된 존재이며, 지기=한울의 두 속성이 인간에게 신체와 정신으로 나타난다. 어떤 궁극의 형이상학적 존재를 제시하고 인간을 그 존재의 적자로 격상시키는 이 구도는 모든 형태의 정신형이상학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구도이며, 야뢰 역시 이 구도를 따르고 있다.
야뢰의 한울형이상학이 결국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철학적 해명이라면, 그의 인간존재론은 결국 ‘인내천’(人乃天)의 철학적 해명이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야뢰는 ‘인간격 중심주의’로 규정한다. 여기에서 ‘격’(格)은 수평적으로는 우주의 각 부분/영역이며, 수직적으로는 각 영역의 가치론적 위(位)이다. 한울은 우주격이며, “우주격은 진화 향상(向上)하면서 최종으로 인간격이라는 격을 이루어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향상하면서”는 목적론적 진화론을, “최종으로 …”는 인간이 우주의 과실임을 함축한다. “우주의 전(全) 중심이 자연계를 통하여 인간계에 솟아오른 우주 중추신경의 과실을 일러 인간격이라 한다.”
야뢰는 이런 구도에 입각해 인내천을 개념화한다. ‘인내천’은 “우주격이 인간에 의하여 표현된 것” “우주 생활 중 인간격이 인간에 의하여 표현된 것”이다.(‘우주 생활’에서의 ‘생활’(生活)은 일상어에서의 생활이 아니라, 한자어 그대로의 의미로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야뢰는 인내천 사상이란 내세를 갈망하는 기독교라든가 탈세간적인 해탈을 꿈꾸는 불교 등의 종교들과 대비되는, 보다 현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임을 강조했다. “인세(人世)는 결코 타락의 거리도 아니며 죄악의 마을도 아니다. 새로운 생활을 구축할 만한 귀중한 보물들이 가득 찬 보고(寶庫)이다.” 아울러 야뢰는 인내천 사상을 유심적인 것과 유물적인 것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서 규정하고자 했다. 인내천은 고상한 경지만을 추구하면서 현실을 멸시하는 관념론도 아니요, 현실적이고 진취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고상한 경지를 부정하는 유물론―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하려는 자연과학적 유물론이든 경제로 환원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이든―도 아니다.
한울이 ‘물’(物)과 ‘심’(心)을 두 속성으로서 표현하듯이, 한울에 근간을 두는 인간격은 신체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을 두 속성으로서 표현한다. 인내천은 바로 이 인간격을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격의 차원에서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내천 사상은 ‘물’과 ‘심’을 포용하며,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요, 정신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양자의 근간인 인간격을 추구하는 사상인 것이다. 그래서 야뢰는 말한다. “신의 살림은 신으로 돌려라. 자연계의 살림은 자연계로 돌려라. 인간계의 살림은 오직 인간격으로 돌려야 한다.” ‘심’에 치우쳐 초세간적 가치를 추구하거나 ‘물’에 치우쳐 형이상학적 가치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인간격의 차원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단순한 학술적 연구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시대와의 대결을 추구한 대표적인 철학이 동학이었거니와, 동학과 더불어 시대와 대결한 또 하나의 흐름은 사회주의 사상이었다.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아나키즘이라는 세 갈래의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코민테른(제3 인터내셔널)이 제국주의와 각을 세우면서 식민지 민족의 손을 잡음으로써, 당시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던 대부분의 국가/민족이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다. 당시의 조선에서도 사회주의란 대개 마르크스주의를 뜻했다. 동학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역시 새로운 인간을 개념화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했다. 만해 한용운이 ‘불교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쓴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당대 사회주의의 영향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었다. 동학 역시 그러한 흐름의 자장 안에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부분적인 영향은 ‘신인철학’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당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동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동학 사상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변용해서 수용하긴 했으나(예컨대 야뢰는 마르크스의 ‘계급의식’을 그 자신의 기계의식→계급의식→초월의식이라는 단계설의 중간에 위치시켰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시도들을 속류 마르크스주의로 폄하했다. 이런 과정에서 1920년대의 ‘유물론 논쟁’, 1930년대의 ‘반(反)종교 논쟁’과 ‘휴머니즘 논쟁’ 같은 현대 한국 철학사에서의 중요한 논쟁들이 이어지기에 이른다. 대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공격적이었다면 동학은 방어적이었다.
한 사상이 다른 사상을 비판할 경우, 후자는 전자의 비판을 흡수하면서 스스로를 바꾸어가고자 한다. 이 경우 전자의 비판은 후자의 변용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동학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을 일정 정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자기 소멸의 계기가 아니라 자기 변용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동학을 비판한 주요 이유는 그것이 종교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핵심적인 논쟁은 종교를 둘러싸고서 전개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두 개념은 ‘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물’을 근본 실체로 보는 유물론이지만, 그것은 자연과학적 유물론(예컨대 만물은 원자들의 이합집산의 소산이라고 보는 원자론 등)이 아니라 사적 유물론, 즉 객관세계와 인간 주체가 변증법적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역사를 이루어간다고 보는 유물론이다.(따라서 이때의 ‘물’은 경제학적 뉘앙스에서의 ‘물’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며, 현대(당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해야 할 시대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이런 사상에 입각해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했고, 레닌은 “인민을 억압하는 정신적 독주(毒酒)”라 했다. 종교는 왜 아편/독주일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어떤 강고한 객체성이 삶을 위압적으로 내리누를 때, 인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편/독주를 마시고 취하는 것뿐이다. 마르크스-레닌의 맥락에서 볼 경우, 이 강고한 객체성은 바로 자본주의라는 체제이고, 이 체제와 싸우기를 포기하고 그것에 영합하고 굴복하게 만드는 아편/독주는 다름 아닌 종교이다. 따라서 계급적 모순이 타파된다면 종교 역시 소멸한다. 강고한 객체성이 무너질 경우 이제 아편이나 독주가 필요 없어지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이돈화의 정신형이상학(한울과 인간격의 형이상학) 역시 일제 강점기라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일종의 아편/독주로서 느껴졌을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장애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당대 동학을 대표하던 이돈화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던 신남철, 박치우 사이의 논전이 있었다면, 한국 현대 철학의 매우 흥미로운 한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런 장면은 성립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동학을 비판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를 흡수해 동학을 발전시키려 했던 여러 인물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김형준(=김오성)은 사회주의적 동학 또는 동학적 사회주의와 그에 기반한 네오휴머니즘을 전개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수운주의자들(동학 사상가들) 사이의 대립은 ‘물’을 근본으로 보고 ‘심’이 그 위에서 성립한다고 본 사적 유물론과 ‘물’과 ‘심’의 동등성을 긍정하고 오히려 후자에 무게중심을 두고서 물심일원(物心一源)의 경지를 추구해간 정신형이상학 사이의 대립이었다.(김형준은 사적 유물론에 주체의 역할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했으나, 사적 유물론은 객체에 무게중심을 둔 객체와 주체의 변증법이지 단순한 환원론은 아니다.) 또 하나, 마르크스주의와 수운주의는 공히 계급 없는 세상을 꿈꾸었지만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한 생각은 판이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국가의 소멸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지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민의 아편인 종교는 소멸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반면 동학사상은 설사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루어진다 해도 최종적으로 정신적인 혁명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인간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종교는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하며, 바로 동학이야말로 그런 변혁된 종교, 새로운 종교인 것이다.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의식’이라는 개념에 무게중심을 두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김형준은 이런 사상을 ‘변증법적 생활태도론’이라는 제하에서 개진했다.
보다 넓게 볼 때, 동학의 신인간·인내천 사상의 추구는 ‘네오휴머니즘’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본주의, 과학기술, 파시즘을 비롯한 거대한 객체성에 짓눌려 왜소해져가던 상황에서, 생(生)의 약동과 의지를 강조한 생철학이라든가 인간존재의 실존을 역설한 실존주의 등의 사조는 르네상스 이래 이어져온 휴머니즘의 흐름을 현대의 맥락에서 새롭게 했다. 동북아에서도 미키 기요시, 김형준, 신남철 등 여러 철학자가 당대의 상황에 걸맞은 휴머니즘 철학을 창조해내기 위해 분투했다.
김형준의 네오휴머니즘을 특징짓는 것은 역시 인내천 사상에 있다. 로고스와 파토스를 종합하는 ‘구상력의 논리’에 기초한 미키 기요시의 휴머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의 조화를 추구한 신남철과는 달리, 김형준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으로부터 생철학,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서구적 휴머니즘에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대비시키면서 형이상학적 휴머니즘을 개진했다.
한국 철학사를 줄기차게 관류해온 결정적인 주제 중 굳이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고대 이래 불교철학이 추구해온 마음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그리고 조선조 500년을 줄곧 관류해온 마음에 대한(‘심’(心), ‘성’(性), ‘정’(情)에 대한) 논쟁들을 생각해보라. 이렇게 본다면, 동학이라는 철학사상의 근저에 존재하는 정신형이상학(한울형이상학)과 네오휴머니즘(인내천 사상) 역시 바로 이 한국 철학사의 중심 끈을 이어간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이런 끈은 바로 ‘포스트휴머니즘’이 운위되는 오늘날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정신적 끈이기도 하다.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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