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년 전 침몰한 영국 전함 500명 몰살... 난파선으로 본 세계사

남상욱 2025. 7. 1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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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데이비드 기빈스 '바다가 삼킨 세계사'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 10월 6일 이집트 홍해에서 독일 군의 폭격을 맞고 침몰한 영국 화물 증기선 '시슬곰(Thistlegorm)'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샤름 엘 셰이크=타스 연합뉴스

1545년 영국 포츠머스 근해에서 전투 중이던 해군 전함 메리 로즈호가 침몰했다. 탈출한 사람은 30명 정도. 이 외 선원 500명은 모두 익사했다. 양쪽 현에서 대포를 쏘는 게 가능했던 메리 로즈호는 프랑스 함대를 향해 대포를 발사한 뒤, 포문을 열어둔 채 선회를 하다가 옆으로 넘어갔다. 포문으로 물이 들이닥쳤고, 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배의 진수를 직접 챙겼고, 이후 이혼 문제로 교황과 결별하며 영국 성공회의 문을 열었던 헨리 8세 눈앞에서 벌어진 참사였다.

430여 년 시간이 흐른 1979년. 찰스 3세가 된 당시 왕세자를 이사장으로 메리 로즈호 재단이 결성됐다. 3년간 500명 이상 잠수사들이 침몰 지역으로 뛰어들었다. 대포와 소화기, 장궁과 도검, 관측 장비와 항해 도구 등 1만9,000점이 넘는 유물이 거기 있었다. 1982년 40% 정도 성한 선체가 인양됐고, 드라이독(선박이 들어올 때 물을 채우고 들어온 뒤 물을 빼는 시설)으로 옮겨졌다. 배는 그 주변에 지어진 메리로즈호박물관에서 현재까지 전시 중이다.

미 포클랜드 제도에서 1914년 포클랜드 전쟁 중 침몰한 독일 전함 SMS 샤른호르스트가 105년 만인 2019년 12월 영국 해군에 의해 발견됐다. 포클랜드=EPA 연합뉴스

영국의 수중고고학자이자 역사가인 저자는 책에서 메리 로즈호를 포함, 총 12척의 난파선을 연대기순으로 소개한다. 기원전 16세기 인류 최초 무역선 도버 보트, 아테네 철학자에게 줄 포도주를 실어 날랐던 텍타시 난파선, 급격한 기후 변화로 생존을 걸고 항해해야 했던 바이킹의 롱십,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의 작품을 '배달'하다 난파했던 산토 크리스토 디 카스텔로호, 은괴 수송 작전을 수행하다 독일 유보트에 격침당한 SS 게어소파호 등이 그들이다.

저자는 "서사와 시대, 배경 같은 모든 층위의 역사에 접근할 특별한 길을 열어준다"며 청동기 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의 3,500년 역사를 난파선을 매개로 현란하게 짚어낸다. 난파라는 하나의 사건 안에서 머무르지도 않는다. 1845년 북극 항로를 찾으러 가다 난파됐던 HMS 테러호의 프랭클린과 대원 128명의 비극을 설명하다가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소개한 뒤 청나라와의 아편 전쟁까지 슬그머니 얘기하는 식이다.

또 그 행간은 영국의 노예무역 금지법이나 당시 최대 산업이었던 면화 얘기로 채운다. 그 시절 노동 조건과 사법 체계를 찰스 디킨스가 폭로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프랭클린 대원들이 사투하는 동안 아일랜드에서 50만 명이 아사했고 또 다른 50만 명은 미국으로 떠났다는 언급도 등장한다. "배들은 각자의 시대를 담은 소우주"라는 저자 인식이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1802년 9월 그리스 남부 키티라섬 인근에서 침몰한 화물선 '멘토르'에 실려 있던 유물들을 2019년 10월 잠수사들이 인양하고 있다. 키타라=EPA 연합뉴스

책은 그렇다고 거시적 흐름만을 전하지 않는다. "개인의 경험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고고학은 강력한 역사적 도구가 된다"는 이유로 황금과 해적, 노예선이었던 로열 앤 갤리호에서 발견된 회중시계 부속과 애도 반지(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을 기억하는 반지)의 의미를 소개한다. 메리 로즈호에서 나온 이발사 겸 외과의사의 호두나무 상자와 후추 열매가 담긴 나무통, 당나라와 바그다드를 오가다 침몰했던 벨리퉁 난파선에서 발견된 순금잔과 은사발, 그리고 청동 거울을 중요한 시대 유물로 설명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진짜 중요한 것은 개별 인물"이라며 익사했던 혹은 탈출했던, 그것도 아니면 난파선과 연관된 인물들을 생생하게 소환한다. 이를 통해 청동기 시대의 네페르티티 여왕, 철학자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대의 안과의사, 대서양의 여러 탐험가들 얘기를 접할 수 있게 된다. 튜더시대의 헨리 8세와 아내 아라론의 캐서린, 왕에게 목숨을 바쳤던 아프리카인 궁수, 유보트 공격에 무력하게 당했던 리처드 아이레스와 동료 선원들도 그렇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렘브란트,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같은 '신스틸러'도 책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들은 바다가 알려주는 '인내'라는 영원한 지리, 민족적 다양성과 경계 없는 해양 문화를 대표한다"며 "바다의 밑바닥을 벗겨내는 건 위대한 문서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바다를 좋아한다면, 그 밑에 숨겨진 '위대한 문서'가 궁금하다면, 3,000년 시간 흐름을 한숨에 따라갈 수 있다면, 이 책은 주말 하루 시간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다가 삼킨 세계사·데이비드 기빈스 지음·이승훈 옮김·다산초당 발행·516쪽·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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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욱 엑설런스랩장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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