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판, 거리의 미술관 되다

문소영 2025. 7. 1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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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대로 ‘디지털존’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회화들의 영상이 떠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도심의 전광판들이 예술을 위한 캔버스로 변모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먼저, 상습 정체 구간이자 하루 평균 24만 대 차량이 지나가는 서울 올림픽대로 여의도~노량진 구간에서 이제 교통 체증으로 피곤한 눈을 위로 들면 친근한 화풍의 그림 6점을 만날 수 있다. 지난 1일 이 구간에 대형 디지털 전광판 6기로 구성된 디지털존이 신설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각 전광판에 6점의 주요 소장품 이미지를 띄워 “도로 위 미술관”을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들은 한국 근현대미술가 장욱진·서세옥·김상유·황규백·이제창·주경의 작품이며, 사전 대국민투표를 통해 선정됐다. 5월부터 진행 중인 2025 캠페인 “지금 여기, 국립현대미술관” 시리즈 중 일부로 이 캠페인 이후에는 한국화 컬렉션, 현대미술 기획전 등의 콘텐트도 이어질 예정이다.

이 디지털 존은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옥외광고센터가 수행하는 기금조성용 옥외광고사업 일환으로, 옥외광고회사 ‘올이즈웰’이 새롭게 디자인하고 론칭해 운영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본 사업이 도시 경관을 선도하는 공공예술 플랫폼으로 역할하는 데 기여하고자 협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 뿐만 아니라, 서울 도심 한복판을 오고 가는 올림픽대로 위까지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전시장이 확장되어 보다 많은 국민들에게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일상 속에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어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전광판 ‘신세계스퀘어’에 뜬 강이연 작가 미디어아트. [사진 신세계백화점]
거리 위 미술 실험의 또 다른 중심은 신세계백화점 본점 외벽의 초대형 전광판 ‘신세계스퀘어’다. 농구장 3개 크기인 1292㎡의 LED 사이니지에는 현재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강이연의 신작 ‘얽힘(Entanglement)’이 상영되고 있다. 이는 신세계 본점 더 헤리티지관의 ‘헤리티지 뮤지엄’에서 지난주 시작한 강이연 개인전과 연동된 영상작업으로 뮤지엄 내 6분짜리 몰입형 키네틱 영상 설치작의 마지막 파트를 1분 버전으로 추출해 도심 스케일에 맞게 확장·변주한 것이다

뮤지엄 내 작품은 각각 움직이는 이미지를 담은 두 개의 스크린이 서로 떨어졌다 겹쳐졌다를 반복하면서 각 스크린의 이미지들 역시 융합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탄생 시키는 구조로 되어있다. 하나의 스크린은 인간 형상이 해체되고 재구성 되는 낯선 모습을, 다른 하나의 스크린은 데이터와 같은 추상적 기계 이미지를 보여준다. “영상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오브제들에는 인간의 손과 뇌, 로보틱 암, 양자 컴퓨터, 탄소 구조체, 화석, 뉴럴 네트워크 아키텍처 등 이종적 존재가 포함되어 있는데, 두 스크린이 움직임을 통해 분리되고 중첩되면서 각각의 이미지들이 점차 유기적으로 변하고 합쳐진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AI를 비롯한 기술이 초래하는 인간 존재의 진화와 퇴보 사이의 모호한 경계, 즉 ‘인간과 비인간의 얽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신세계스퀘어’는 지난해 11월 1일 처음 대중에게 공개됐으며 이후 각종 광고 외에도 여러 미디어 아트 작업을 상영해 왔다. 처음 올렸던 것은 신세계와 국가유산청이 착시 원리를 이용해 입체감과 현장감을 표현하는 아나몰픽 기법으로 재해석한 작품 ‘청동 용’이었다. 신세계백화점은 신세계스퀘어의 미디어 아트 상영을 통해 예술의 공공화를 실현하고 ‘K콘텐트 허브’로서 정체성을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전광판을 예술의 무대로 삼는 시도는 팬데믹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20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앞 대형 전광판 ‘K팝 스퀘어’에서 선보인 미디어 아트 유닛 ‘에이스트릭트(a’strict)‘의 ’WAVE‘였다. 착시 효과를 활용한 이 영상은 가상의 파도가 유리 벽을 뚫고 나올 듯한 생생한 입체감으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코로나19로 전시장 출입이 제한된 기간이라 이러한 ’거리의 전광판 미술관‘은 더 호응이 컸다.

이후 2021년에는 같은 공간에서 영국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이패드 드로잉을 애니메이션화 한 신작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가 상영되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연상시키는 노란 태양이 떠오른 후 제목과 같은 문구가 뜨는 작품으로, 팬데믹에 지친 시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다. 이 전시는 영국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카(CIRCA)‘의 일환으로, 거리의 전광판이 잠시 상업 광고를 멈추고 예술을 상영하자는 국제 캠페인이었다.

팬데믹 이후에도 도심의 전광판을 광고 사이니지 뿐만 아니라 거리의 미술관으로 활용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공공 공간이 결합해 예술이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는 셈이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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