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 경계를 넘다 “사자보이즈가 날 여기로 이끌었네” “이분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디어가 있어서 사자보이즈가 있었던 것”. 윤별발레컴퍼니 창작발레 ‘GAT’ 영상에 달린 댓글들이다. 세계를 강타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사자보이즈의 원조인가 싶게 똑 닮은 저승사자들이 춤추는 한국적 색채의 ‘K발레’다. 지난해 초연 때부터 전석매진을 기록하고 올해 강경호·김유찬·정성욱 등 ‘스테이지 파이터’ 무용수들이 가세해 최근 전국투어까지 마쳤다. 투어 도중 ‘케데헌’이 뜨자 커튼콜에 사자보이즈를 패러디하고, 사자보이즈 노래를 입힌 쇼츠까지 제작해 ‘떡상’ 중이다. 시작도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이었다. 발레리노 윤별은 “당시 우르과이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며 드라마를 계기로 갓 아이템이 핫해지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을 개발했다”면서 해외투어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그 촉매가 ‘K’, 즉 ‘전통’이라는 게 흥미롭다.
윤별발레컴퍼니 ‘GAT’에 출연한 강경호·정성욱 ·김유찬 등 무용수들이 커튼콜에 사자보이즈를 패러디했다. [사진 now_ooki]
저승사자들의 춤이 난리다. Mnet 춤 서바이벌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팀 코리아 ‘범접’도 한몫 했다. ‘스우파’ 시즌 1의 리더들로 구성된 ‘범접’은 이번주 세미파이널에서 탈락했지만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승부했던 메가크루 퍼포먼스는 ‘최고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리더 허니제이가 저승사자 이미지와 태극기 색채를 활용해 디렉팅한 영상 ‘몽경’은 3일 만에 1000만 뷰를 돌파(18일 현재 1600만 뷰)하며 유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 1위에 올랐다.
‘월드오브 스우파’ 범접 크루의 영상 ‘몽경’. [사진 Mnet]
이 영상에는 국가유산청·국악방송·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등 관계자들이 몰려와 “전통 공연은 저희 전문인데 이 무대 감히 범접 못하겠습니다” “국가유산급 퍼포먼스”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럴 만 하다. 현재 K팝 신에서 맹활약하는 글로벌 뮤직프로덕션팀 더 허브(THE HUB)가 꽹과리·북·장구 등 전통 타악기와 밴드 사운드를 융합시킨 음악부터 강렬하게 ‘국뽕’을 고취시킨다. 갓과 한복에서 영감을 취한 비주얼, 선비춤과 무속의 동작을 힙합과 결합한 안무도 다채롭다. 허니제이의 아이솔레이션으로 구현한 기괴한 저승사자춤과 굿판을 누비는 무당 같은 립제이의 왁킹, 리정의 상모 없는 상모돌리기, 한량무를 100배속으로 돌린 듯한 바다의 부채춤, 집단적 에너지와 음양 사상을 시각화한 하이 앵글까지, 전통의 요소를 깨알처럼 활용한 세련된 영상이다. 어느새 핫해진 우리 전통이 첨단 대중문화의 재료로 거듭난 것이다.
K의 시너지가 이렇다. 전통예술이 사라질까봐 보존에 급급했던 것도 옛말이다. 무속마저 글로벌 콘텐트가 되는 ‘K의 시대’, 전통에 대한 접근법도 달라졌다. 가장 힙한 아티스트들이 전통을 재료로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국악 신동’으로 유명했던 경기민요 소리꾼 송소희가 대표적이다. 열 살 때 전국노래자랑에서 창부타령을 부른 이후 ‘민요계 아이돌’로 통했지만, 국악의 틀 안에 머물지 않았다. 지난해 ‘부캐’로 현대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싱어송라이터로 변신,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인 자작곡 ‘낫 어 드림(Not a Dream)’이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발매 전이던 지난 1월 업로드한 콘서트 실황 영상이 1600만 뷰를 기록했고, 최근 국제 무대에도 데뷔했다. 지난달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도나우인젤페스트에 참가해 30분간 공연을 펼쳤다. 앵콜곡까지 모두 끝난 후에도 현지 관객들의 호응이 뜨거워 예정에 없던 추가 앵콜을 진행해야 했다.
‘낫 어 드림’은 대중적인 멜로디의 일렉트로 팝을 민요 특유의 창법에 실어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광활한 스케일의 청각적 체험을 준다. “대자연의 소리 같다” “국악 같지만 뭔가 다른 경지로 가버린 느낌”이라는 반응이 대세다. 전문가들도 전통음악과 대중성의 경계를 가창 자체로 허무는 시도가 차별점이라고 평한다.
세종문화회관 싱크넥스트 2025 개막작 ‘루시드폴-정마리-부지현 on SyncNext’. [사진 세종문화회관]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국악과 대중음악의 접점이 만들어진 순간들이 광복 이후 꾸준히 있었지만 음악만으로 승부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씽씽, 이날치도 독특한 안무나 비주얼이 큰몫을 했다”면서 “송소희의 경우 전통음악 창법은 가져오되 편곡과 멜로디는 철저히 ‘팝-록’의 대중성을 갖고 있는 데다 전통에서 유래한 가창이 오히려 현대 한국인들에게 낯설고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아일랜드 민요 창법을 도입했지만 악곡은 철저히 팝적이었던 시네이드 오코너, 크랜베리스가 개성을 인정받고 인기를 얻은 사례와 비교할 만하다”고 분석했다.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이 교차하는 트렌드의 난장은 지금 ‘싱크넥스트’와 ‘여우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각각 세종문화회관과 국립극장의 여름 페스티벌로, ‘장르 구분 없이 첨단 예술가들이 만나는 장’을 꾸준히 표방해 왔다. 올해 싱크넥스트는 지난 4~6일 열린 개막공연 ‘루시드폴-정마리-부지현 on SyncNext’부터 신선한 충격이었다.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이 만든 앰비언트 사운드스케이프와 설치미술가 부지현의 빛과 연기가 깊은 바닷속 가상의 공간을 만들었고, 정가 가객 정마리가 부르는 세이렌의 노래에 마음을 홀린 관객들은 난파선 유령들처럼 드러누워 작품의 일부가 됐다. 바다에 드리는 제의와도 같은 이 커다란 예술을 완성시킨 것이 천상의 소리를 닮은 정가 창법이란 게 기발하다. 한 음절을 20초까지 끌 정도로 템포가 느려 현대인이 좀처럼 듣기 힘든 노래가 초현대적인 예술에 고급 재료로서 기능한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국립무용단 ‘파이브 바이브’. [사진 국립극장]
여우락은 올해 ‘오방신’으로 유명한 괴짜 소리꾼 이희문이 예술감독을 맡아 ‘민요의 가요화’에 집중하고 있다. 인순이·최백호·민해경·아이비 등 대중가수들이 들려준 민요도 색달랐지만, 13일 공연된 ‘사우스바운드’의 무대가 파괴력 있었다. 이희문이 뛰어난 즉흥 연주 실력으로 홍대 클럽에서 최고 인기라는 흑인음악 기반 인디밴드 까데호와 국립창극단 출신 소리꾼 정은혜의 만남을 주선한 것. 재즈·록·펑크·메탈까지 혼합된 사운드에 흥타령·육자배기·새타령 등 남도민요 가락을 얹어 록스피릿이 느껴지는 판소리 보컬로 토해내니 ‘K-밴드 민요’의 탄생에 관객들은 클럽에 온 듯 모두 일어나 방방 뛰었다. 보컬이 없던 까데호로선 ‘K보컬’을 더해 완전체가 됐고, “인디밴드 신인 보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은혜는 소리꾼의 영역을 클럽까지 확장시켰다.
전통에 기반한 국공립 예술단체들도 접근법이 달라졌다. ‘전통의 현대화’보다 현대예술가에게 재료를 제공하는 방향성이다. 국립무용단의 최근작 ‘파이브바이브’가 딱 그렇다. 지난해 ‘스테이지 파이터’로 재발견된 한국 남성춤의 매력을 현대무용가 예효승을 통해 극대화시켜 보여주며 전석매진의 호응을 얻었다. 모처럼 쏟아진 대중의 관심을 놓치지 않고 흡수한 것인데, 예효승은 ‘한국춤 현대화’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한국무용수를 재료 삼아 자신의 안무 언어를 구사했을 뿐이다. 현대무용이나 비보잉처럼 빠르게 돌고 바닥을 구르거나 물구나무를 서는 군무 속에서 유유히 춤선을 과시하는 솔로의 극단적 대비가 한국춤의 바이브를 강조하고 있었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한류가 한 단계 도약하려면 전통문화에 동시대적 감각을 입힌 콘텐트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국공립단체들이 장르 간 경계를 없애는 더 과감한 시도에 나서야 창의적인 콘텐트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기 서울시국악관현악단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 ‘임윤찬 픽’으로 요즘 가장 핫한 10대 현대음악 작곡가 이하느리에게 첫 국악관현악곡 ‘Unselected Ambient loops 25-25’를 위촉한 것. 사전 인터뷰에서 이하느리가 “악기가 다를 뿐 평소 작곡할 때와 똑같이 접근했다”고 말했듯, 국악기를 재료 삼은 현대음악이었다. 전형적인 국악장단과 다른 반복적 루프 구조를 만들어 국악기의 고유한 음색을 도드라지게 확장시키는 연주법으로 구현한 이국적이고 세련된 음악에 객석의 반응도 뜨거웠다.
이소영 음악평론가는 “앰비언트 음악과 존 케이지의 ‘4분33초’, 메시앙의 투랑갈릴라교향곡을 적당히 잘 버무린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라며 “국악관현악을 보다 효과적으로 쓰려면 좀 더 진지하게 전통음악 공부를 해야겠지만, 새로운 자극이 주어져 국악관현악 창작계에 선의의 경쟁이 생기고 새로운 청중이 유입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과감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지점”이라고 평가했다.
국내용 기획은 아니다. 이 공연을 제작한 세종문화회관은 이하느리를 상주작곡가로 선정하고 런던 로열페스티벌홀 공연 등을 추진하고 있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과거에 ‘햄릿’을 한국식으로 만들면 영국에서 관심을 갖는 차원이었다면 이제 저들은 우리의 고유한 텍스트에 관심을 보인다”면서 “K가 세계 공연계의 가장 새로운 컨템포러리가 됐고, 이런 K트렌드는 인간이 가장 보수적으로 가진 청각적 취향을 K팝이 먼저 바꿔 놨기에 가능했다. 국악을 전통으로 보는 기성세대가 아니라 차별화된 사운드로 인식하는 젊은 세대가 고유의 텍스트로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있으니, 이걸 즐기는 새로운 인류가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