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이야기- 진주 대동공업] 6부 김삼만과 기공일생(機工一生) (19) 세 가지 꿈
1967년 미국 국무성 초청 현지 기업 견학
11개 도시 업체·기관 30여곳 노하우 청취
1973년 외국 탐방땐 한국농업전시관 결심
농기계 기술 바탕 ‘김삼만車’ 제작 추진도
교육재단 설립 진주 대동기계공업고 개교
我有夢. I have a dream.

진주에 위치한 대동기계공업고등학교는 2007년 자동차 전문 특성화 학교로 지정되면서 교명도 경남자동차고등학교로 변경했다./경남자동차고등학교/
◇우물안 개구리, 호수를 만나다
1967년 5월, 김삼만은 미 국무성 초청으로 짧은 역사 속에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발전한 미국을 견학할 기회를 가졌다. 그 당시의 미국 주요 기업의 특징을 지금의 미국과 비교도 할 수 있어 유익한 기록이라 생각하였다.
서부지역 샌프란시스코, LA를 비롯, 텍사스주의 그레이트 사우스웨스트 공업 단지도 견학하였다. 이곳은 단지내 15만 평 규모의 공원과 유원지도 설치하여 인간과 공장의 가장 친화적인 설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부지역에서는 시카고의 과학산업박물관을 통해 미국 과학의 지나온 발걸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미국 방문에 빠질 수 없는 곳이 MIT, 즉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이다. 미국의 최고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는 하버드대학교 경영학과와 MIT 공대 졸업생이 미국의 산업계와 경제를 리더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 대학마다 부설 연구소에서 산업계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직접 교류하여 기업 발전에 공헌도 하고 있다. 산업계가 대학을 활용하고 대학이 업계를 지원하는 산학협동(産學協同)이 잘 구성되어 있다.
뉴욕에서는 제너럴 모터스 회사, 시몬스 정밀계기 전문기기 회사도 방문하였다.
IBM 자매회사인 월드트레이드사를 방문하여 현대 경영을 주제로 급속하게 활용하는 ‘경영에서의 컴퓨터 활용’에 관한 설명도 들었다.
미국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운영되는 사무실이 없을 정도로 미국의 경영 속도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컴퓨터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을 때 미국은 컴퓨터로 업무를 본다는 것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방미 기간 중 13개 제조업체, 6개 연구소와 용역소, 4개 은행, 1개 발전소, 2개 정부 기관 등 모두 30여 곳과 11개 도시를 방문하였다.
5주간 200여명의 기업 최고 경영자, 은행가 및 정부 관계자를 만났다. 강의, 토론, 질의응답, 공장 견학 및 체험을 통해 배운 내용은 하나도 버림 없이 대동공업을 경영하는 데 응용하고 도입하였다.

지난 2022년 수원에 개관한 국립농업박물관. 김삼만도 박물관 건립을 꿈꿨다./박물관 누리집/
◇김삼만의 첫 번째 꿈, 농업박물관 건립
김삼만 사장은 1973년 3월, 오덕준 회장과 함께 시장 개척차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포드 회사 방문 때 회사 내 건립된 포드박물관도 견학했다. 포드 회사 설립 초기부터 생산한 자동차, 기관차, 농업기계, 항공기의 각종 엔진 등이 전시돼 있었다.
전시를 통해 포드사가 세계의 자동차로 된 과정과 역경을 이겨낸 흔적을 알 수 있었다. 김삼만은 농업기계 분야만이라도 포드 회사 박물관처럼 대한민국 농업사의 기록과 실체를 한자리에 모아 역사의 흔적을 전시하겠다는 결심을 가졌다.

1961년 김삼만이 미군 군용 트럭 엔진을 활용해 제작한 상용 자동차. 1962년 정부가 자동차 육성법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자동차 사업 허가 신청을 공고했는데, 대동공업사도 신청서를 제출해 2순위로 지정되기도 했다. 위 작은 사진은 대동에서 생산한 다목적 운반 자동차이다./대동50년사/
◇두 번째 소망, 자동차 제작
김삼만의 두 번째 꿈은 대동공업사에서도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다.
김삼만 사장이 말년에 지인에게 한 유명한 표현이다 “나는 기공인(技工人)이다. 기업가로서의 기공이다. 일생을 바친 기공인생(技工人生)이다. 탈곡기, 수확용 선풍기, 원동기 등 농기구 제작과 자동차 정비 사업은 잘되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나의 꿈은 아니다. 나는 자동차 정비를 해보아서 자동차의 원리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대동공업사는 경운기, 트랙터 등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모두 동력장치라 자동차 제작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동공업사가 가진 시설, 기술자, 원동기 및 각종 농기구를 제작하면서 습득하고 익힌 기술력을 바탕으로 하여 ‘김삼만 자동차’를 만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김삼만은 1961년에는 미군 군용 트럭 엔진을 활용, 상용 자동차를 직접 제작도 하였다. 그리고 정부의 자동차 사업 계획에 신청서를 제출한 적도 있다. 1962년 정부는 자동차 육성법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자동차 사업 허가 신청을 공고하였는데, 대동공업사도 참여하여 2순위로 지정된 기록도 있다.
단지 현재의 대동공업사 생산능력이나 기술로 볼 때 시기가 맞지 않을 뿐 결코 자동차 제작의 꿈이 막연하거나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세 번째 꿈은 한국 최고의 공업대학 설립
김삼만은 국가의 성장은 공학의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공학 인재 양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의 MIT 같은 세계적인 공과대학을 설립하는 계획을 가지고 바로 실행을 하였다. 먼저 교육재단을 설립하고 대동기계공업고등학교(현 경남자동차고등학교)를 개교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김삼만 대동그룹 회장은 1975년 5월, 창업 형제, 그리고 아들 김상수와 창업 형제의 자녀를 한자리에 모이도록 했다.
김삼만은 창업 형제들에게 “대동그룹을 아들 김상수와 조카 김사옥에게 경영과 생산을 맡겨 능력을 배양하도록 하고 싶다. 아우들은 조카들이 잘해 나가도록 도와 주어라. 나(김삼만)는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이날부로 김삼만 회장의 지시로 대동그룹의 중심회사인 대동공업㈜의 경영체제는 단일체제에서 공동대표제로 바뀌게 되었다.
운명 3개월 전이다. 어쩌면 미래를 예측한 듯 생전의 유언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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