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첫’] 만년필을 다시 꺼내며…잊고 있던 ‘처음’의 가슴 뛰는 마음으로

관리자 2025. 7. 1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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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첫’] (3) 첫 만년필
어머니에게 선물받은 만년필 한자루
예전엔 성인식 통과하는 의례와 같아
고치기 힘든 만년필로 글씨 쓰면서
글쓰기의 무게와 책임감 느끼게 돼
잠시 잊고 살던 초심과 설렘 느끼고파
작은 메모지에 몇글자 적고 싶어져
일러스트=이철원

‘발로 걸어 다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시대가 왔다.’ ‘손으로 글자를 쓰던 시대는 지나가고, 타자기로 찍는 시대가 왔다.’ 1960년대 중반 공병우 타자기를 선전하던 신문의 광고카피다. 그 수동식 타자기는 상당한 고가로 판매가 됐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타자기는 일부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 사용했을 뿐 널리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펜의 시대는 끈질기게 오래 지속됐다.

1974년에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검은 교복에다 교모를 쓴 나를 이끌고 어머니는 문구점으로 향했다. 만년필 진열대 앞에서 두리번거리던 어머니는 녹색 만년필을 한자루 사서 내게 주셨다. ‘파이롯트(PILOT)’ 상표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교복 왼쪽 가슴 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 그 순간 만년필은 이 세상의 모든 환한 빛을 끌어모아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열네살 소년의 어깨는 산맥처럼 펼쳐졌고, 꽉 쥔 두 주먹은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처음 갖게 된 값싼 국산 만년필 한자루 덕분에 나는 아주 위세를 부리는 소년이 된 것처럼 기분이 으쓱해졌다.

예전만 해도 만년필을 갖는다는 것은 성인식을 통과하는 의례와도 같았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쓰고 지우기가 용이한 연필을 주로 사용했다. 어른들은 중학생이 돼야 펜을 가지고 쓸 수 있다고 말했다. 한번 쓰면 다시 고치기가 힘든 만년필 글씨, 그것은 만년필을 잡는 순간 뭔가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내게 왔던 첫번째 만년필은 지금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책임을 지는 글쟁이가 돼야 한다고 내게 말하는 듯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문학에 빠져들었다. 백일장이나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할 때면 원고지 칸에 반듯반듯하게 글씨를 써서 제출해야 했다. 문예반 선배 중에 누가 봐도 보기 좋은 멋진 필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그 선배가 내 글씨를 보더니 공모전에 낼 자신의 단편소설을 원고지에 옮겨 써달라고 했다. 나는 그 선배의 글씨를 흉내 내 만년필로 80매 정도의 원고지를 메웠다. 그 원고는 당선작이 되었고, 선배는 내 글씨체 덕분이었다고 고마워했다. 짜장면을 한그릇 얻어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 배운 문학은 만년필 끝에서 나왔다.

꽤 오래전에 개봉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기억하는 건 만년필 때문이다. 프린스턴대학교의 천재적인 경제학자 존 내시 교수는 사랑과 사회적 혼란으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실력을 인정받는다. 이때 동료 교수들이 그를 찾아와 자신이 아끼던 만년필 한자루씩을 그의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고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들은 호들갑스럽게 말하지 않고 만년필을 건네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진심으로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그 행위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파카·몽블랑·워터맨 같은 브랜드 가치 높은 만년필을 어쩌다가 선물받았을 때의 기쁨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몽블랑의 뚜껑 끝에 붙어 있는 만년설의 이미지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 속으로 빨려들곤 했다. ‘만년이 가도 녹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만년설과 같은 문장을 만년필로 단 한 문장만 적을 수 있다면’ 하고 꿈꿨다. 컴퓨터 워드 프로세스가 등장하면서 그 화려하게 빛나던 만년필의 시대는 갔다. 몇자루의 만년필은 검고 싱싱한 잉크를 빨아들일 기회도 없이 책상 서랍 속에서 뒹굴고 있다. 그 누구도 만년필을 선물하면서 존경과 격려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래 쓰지 않던 만년필에 잉크를 수혈해 글씨를 써보고 싶다. 앞으로 신간이 나오면 예전처럼 만년필로 사인을 해봐야겠다. 작은 메모지를 건넬 일이 있을 때도 만년필로 몇글자를 적어봐야겠다. 설레고 가슴 뛰던 처음의 마음으로.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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