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칼럼]“아이가, 괜찮아요” - 조문주 (일문학자·텍스트힙 대표)

knnews 2025. 7. 17.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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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 책방 앞 가로수에서 매미 소리가 쏟아진다.

내게도 매미 울음은 그렇게, 불현듯 찾아와 기억을 흔들고 이내 사라지는 여름의 한 조각이다.

그날 이후 여름이면 매미 소리가 나를 그 여름으로, 아버지 곁으로 데려간다.

쏴―쏴― 한여름 장대비처럼 매미 울음이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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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 책방 앞 가로수에서 매미 소리가 쏟아진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풍경을 일본에서는 ‘세미시구레(蟬時雨)’라 부른다. 매미 울음이 소나기처럼 퍼붓는 순간이다. 매미는 성체로 단 2주일을 산다. 숨 가쁘게 울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시인 아베 미도리조는 그것을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는 소리”라 했고, 박재삼 시인은 정수리부터 목덜미까지 흠뻑 적시고 스쳐 가는 소나기 같은 사랑에 비유했다. 내게도 매미 울음은 그렇게, 불현듯 찾아와 기억을 흔들고 이내 사라지는 여름의 한 조각이다.

1995년 여름, 박사과정 수속을 위해 일본에 잠시 머물던 어느 날이었다. 국제전화 부스 너머로 짧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적막 속에서 매미 울음만이 장대비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그날 이후 여름이면 매미 소리가 나를 그 여름으로, 아버지 곁으로 데려간다.

아버지는 내 인생을 조용히 응원해 주던 단 한 사람, 나만의 응원단장이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는다’는 핀잔이 익숙하던 시절,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몽사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집에 들여놓은 것도 아버지였다. 주황색 양장본에 보호용 커버까지 씌워진 그 전집은 어린 마음에 보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해 독후감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초등학교 시절 내내 내 꿈은 작가였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아버지 덕분이다.

말수가 적었던 아버지는 내가 불평을 해도, 걱정을 털어놔도, 자랑을 해도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이가.” 짧은 한마디에 ‘속상하겠구나’, ‘괜찮아, 곧 지나갈 거야’, ‘잘하고 있어’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말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지난 삼십 년 동안 그 말이 간절했던 순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 마음 한구석에서 그 말이 떠올랐다. “아이가, 괜찮다.” “아이가, 잘될 거야.” 그 말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다시 걸을 힘이 생겼다.

얼마 전 책방 모임에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위로 한마디’를 나눈 적이 있다. 고향이 정읍인 청년은 기차 안내 방송 “다음 역은 정읍입니다”를 듣고 싶다고 했다. 삶이 고단할수록 마음은 그리운 곳을 향하는 법이다. 또 어떤 이는 “너는 무서워도 끝까지 갈 사람이야”라는 시인의 문장을 골랐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는 직장인은 오랜만에 자신에게 이 말을 해 주고 싶다고 했다. “네가 최고야.”

누군가는 말한다. ‘괜찮아, 잘될 거야’ 같은 말은 이제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모두, 여전히 말의 위로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담은 말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이제 그 말을 내 안에서만 되뇌지 않는다. “퇴사당했어요”라며 속상함을 털어놓는 이에게, “죽을 만큼 바빠요”라며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에게 조심스럽게 건넨다. “아이가, 괜찮아요. 다 지나갈 거예요.”

쏴―쏴― 한여름 장대비처럼 매미 울음이 퍼진다. 여름이 지나면 그 소리는 사라지겠지만, 아버지가 남긴 그 말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가 빛나길 바라며 그 말을 건넨다. “아이가,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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