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50만의 유럽 항공우주 수도 툴루즈…'서울공화국' 한국은 과연?

[EBS 뉴스]
프랑스 남서부의 도시 툴루즈는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도시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의 프랑스 관광과 무역은 수도인 파리를 중심은 이뤄지고 있고, 지중해를 끼고 있는 마르세유와 니스 등 남부 도시들이 그나마 유명한 정도입니다.
하지만 툴루즈는 유럽 우주항공 산업의 확고한 중심으로 평가받습니다. 1916년 항공기 생산과 1918년 항공 우편 서비스 개시로 시작된 툴루즈의 항공 산업 역사는 정부의 장기적인 전략, 강력한 산학연 클러스터,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인재 양성 시스템이 결합해 현재의 위상을 구축했습니다. 게다가 현재 50만명 수준인 인구도 매년 1만명씩 늘고 있다고 하니, 인재와 산업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서울공화국’에서 온 취재기자는 그 비결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유럽 우주항공 수도’ 전략적 분산 정책의 결실
툴루즈가 현재와 같은 우주항공 중심지로 부상한 배경에는 1960년대 프랑스 정부의 고도로 계산된 산업 분산 정책이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전후 재건 과정에서 파리에 과도하게 집중된 경제 활동을 분산시키고, 국가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특히 우주항공과 같은 첨단 산업 분야에서 국가적 독립성과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국토정비지역행동위원회(DATAR)와 같은 국가 기구는 이러한 목표 아래 파리 이외의 지역을 전략적인 산업 거점으로 육성했습니다. 툴루즈는 이미 존재했던 항공 관련 산업 기반 덕분에 이러한 정책의 핵심 대상이 되었고,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은 툴루즈를 단순한 지역 도시를 넘어 세계적인 우주항공 산업의 중심으로 변모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됐습니다. 이는 국가 차원의 명확한 비전과 강력한 정책 추진이 특정 산업의 지역적 성장을 어떻게 견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 혁신을 이끄는 생태계: 에어로스페이스 밸리와 산학연 클러스터
툴루즈는 에어버스, 탈레스와 같은 세계적 기업은 물론 수많은 항공우주 스타트업과 연구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에어로스페이스 밸리(Aerospace Valley)'의 거점입니다. 2005년 툴루즈와 보르도를 중심으로 구축된 이 클러스터는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항공우주 분야 기술 혁신과 협력을 촉진하는 핵심 동력으로 기능합니다.
틸로 쇤펠트(Thilo Schönfeld) 에어로스페이스 밸리 국제협력담당관은 클러스터의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에어로스페이스 밸리에 소속된 우주항공 분야 종사자가 프랑스 전체 관련 산업의 40%를 차지합니다. 에어로스페이스 밸리 차원에서 진행하는 연구개발 프로젝트만 920개에 달하고,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자금만 20억6000만유로(약 3조 3171억원)에 이릅니다”
이러한 수치는 툴루즈가 단순한 생산 기지를 넘어, 광범위한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 미래 기술을 선도하고 이것이 다시 산업 역량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업, 대학, 연구소가 긴밀히 연계된 이 생태계는 아이디어가 실제 혁신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가속화합니다. 툴루즈 시 부시장 장 클로드 다들레(Jean-Claude Darlot)는 "툴루즈의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연봉, 삶의 질, 비금전적 보상 이 세 가지 요소들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산업적 매력 외에 높은 삶의 질이 인재 유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파리에 비해 물가와 집값은 낮으면서도, 충분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 학생과 연구원, 직장인들의 정주여건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재 양성의 핵심 축: 세계적 대학과 연구 역량
앞서 언급했듯, 툴루즈의 우주항공 산업 성공의 한 축은 견고한 학술적 기반과 체계적인 인재 양성 시스템입니다. 툴루즈는 파리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대학 도시로, 총 11만 7천 명 이상의 학생이 재학 중인데, 이는 툴루즈의 인구 4명 중 한명이 학생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생의 10% 이상은 외국인 학생입니다. 툴루즈가 국제적인 인재를 유치하는 교육 허브라는 점이 수치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주항공 분야에 특화된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인 국립고등항공우주학교(ISAE-SUPAERO)과 일반대학인 프랑스 국립민간항공학교(ENAC)는 툴루즈 모델의 핵심입니다. 이들 기관은 프랑스 국립항공우주연구센터(ONERA)와의 협력을 통해 항공 및 우주 공학 전용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캠퍼스를 꾸몄는데, 매년 550명 이상의 우주항공 전문 인력을 배출합니다.
별도의 선발 시험을 치러야 들어갈 수 있는 국립고등항공우주학교(ISAE-SUPAERO)의 경우 약 1,900명의 재학생 중 40% 이상이 국제 학생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에어버스(Airbus), 사프란(Safran) 등 세계적인 우주항공 기업들과 연계된 안정적인 연구 프로그램과 산학 협력을 통해 연간 2천건 이상의 인턴십 및 취업 기회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연구개발 측면에서는 9개의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33건의 특허 및 발명 선언을 기록하는 등 혁신 상용화에도 나서고 있습니다.
그랑제꼴인 국립고등항공우주학교가 연구 인력 중심의 인재양성기관이라면, 일반대학인 국립민간항공학교(ENAC)는 조종사와 엔지니어 등 항공 운항과 관련된 실무 인력을 양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곳 역시 국제 학생 비율이 절반에 가까운데, 유럽의 우주항공 수도로서 툴루즈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또하나의 증거로 받아들여집니다.
특히 대학의 경계를 허물어서 툴루즈 지역의 기업들의 직원이 안정적으로 대학내에서 연구할 수 있는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직원 1,000명당 16.2명의 연구원을 보유해 프랑스 내에서 연구 집중도가 가장 높은 도시로 꼽힙니다.
●새 정부 균형발전 핵심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교육에 관해 '서울공화국' 현상이 극심한 한국 사회에 툴루즈 모델은 깊은 시사점을 안겨줍니다. 우선, 프랑스의 이 같은 지방 분산화 전략은 결코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최소 50년에서 길게는 1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구축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장기적인 안목과 일관된 정책 추진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또 툴루즈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강력한 리더십과 국가 차원의 아낌없는 지원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인재 양성과 산업체 육성,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정주 여건 개선 등 다각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했을 때 비로소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결코 대학을 한 곳에 몰아놔서, 주무 관청 한 두 개를 옮겨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출범 한 달여를 맞는 우리 새 정부가 추진하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모델 역시 이러한 분산화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실제 대선 공약 당시, '서울대'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 목표는 '국토 균형발전'에 할애되었던 점은, 이 공약이 지향하는 전략적 방향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다만, 지역 거점 국립대에 대한 지원을 서울대 수준으로 높이자는 큰 방향 외에는 아직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툴루즈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역에 견고한 산업적 기반과 대학 졸업 후 인재가 머무를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정주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이는 가뜩이나 어려운 지역 대학 생태계를 오히려 교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특히 툴루즈를 비롯해 대학 균형 발전을 이룬 대부분의 해외 사례들이 대학과 지역마다 특화된 연구 분야를 설정한 것과 달리, '서울대'라는 가장 큰 종합대학 모델을 10개 만들겠다는 구상은 세계적인 고등 교육의 흐름과 괴리가 있어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현재 새 정부의 국정기획위원회가 국정과제를 다듬는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균형 발전과 교육 측면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이 과연 '서울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씻고 지역 발전의 새로운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우주항공 과정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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