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토리] "내 영화의 원천은 문학"…박찬욱 감독이 말하는 '각색'과 '영화화의 꿈'

이세영 2025. 7. 1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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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좋은 문학은 늘 영화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욕망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영화 세계가 문학에서 비롯됐음을 숨기지 않는다.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아가씨', 그리고 올해 하반기 개봉 예정인 신작 '어쩔 수가 없다'까지. 그의 대표작 중 상당수는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제작진은 지난달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5 서울국제도서전' 토크 콘서트 '박찬욱 감독의 믿을 구석'에서 문학과 영화, 그리고 각색의 세계를 카메라에 담았다. 박 감독은 자신이 가장 각색해보고 싶은 한국 문학 작품으로 한강의 '소년이 온다', 신경숙의 '외딴 방', 박경리의 '토지', 이문구의 '관촌수필', 김훈의 '칼의 노래' 등을 꼽았다. K-문학의 정수인 이 소설들이 박 감독의 손에서 영화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는 기대에 토크 콘서트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소년이 온다'는 첫 챕터만 읽고도 '이건 이미 걸작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외딴 방'도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칼의 노래' 같은 경우는 김훈 선생의 문체 자체를 영상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욕심이 큽니다. 그 문체는 감상이 끼어들 여지를 허락하지 않죠."

박 감독은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여행'에 비유했다.

"원작이 있으면 마치 사전에 호텔 예약도 하고, 동선도 다 짜놓은 여행과 같아요. 그러나 실제로 여행을 떠나보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 있기도 하죠."

그가 언급한 대표적인 예는 2022년 개봉한 영화 '헤어질 결심'이다. 박 감독은 "사실 이 영화는 스웨덴 범죄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 중 한 권의 마지막 챕터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작품"이라며 "그런데 쓰다 보니 이야기 방향이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 결국은 그 챕터조차도 흔적 없이 사라졌고, 판권조차 살 필요가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각색은 '글을 영상으로 옮기는' 기술이 아니라, 원작과 영화 사이의 창조적 긴장 위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이다. 그는 "원작을 가진 영화는 분명한 지도가 있지만, 그 길을 벗어나는 순간 오히려 더 좋은 경로를 찾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박 감독은 원작을 해석하는 각색의 태도에 따라 영화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올드보이'는 원작의 척추를 바꾼 각색이고, '박쥐'는 원작에 날개를 달아준 작업이었다. '아가씨'는 원작 '핑거스미스'의 다리에 서울의 감성과 한국적 배경이라는 새로운 다리를 달아준 각색이다.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그 너머로 도약하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각색 미학'은 그가 영화인으로서 이룬 성취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좋은 원작은 훌륭한 영화가 되기 위한 절반의 출발점이 된다"고 강조했다.

박 감독의 첫 대중적 성공작인 '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상연 작가의 'DMZ'를 바탕으로 했다. 그는 이 작품을 "더 대담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발판이 돼준 소중한 영화"라고 회고하며 "JSA라는 특별한 공간이 주는 긴장감,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단의 현실을 세밀하게 다룰 수 있었던 건 원작이 가진 문제의식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올드보이' 속 주인공 오대수의 이야기를 통해, 문학이 어떻게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물음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짚었다.

"감금돼 누가 왜 나를 가뒀는지도 모르고, 언제 풀려날지도 모른다는 설정은 인간의 삶 자체를 상징하는 은유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 채 살아가니까요."

또한, 그 감금 상태에서 유일한 외부 채널인 'TV'를 통해 삶을 견디는 설정도 흥미로웠다고 한다.

"보통 TV를 '바보상자'라고 하죠. 하지만 다양한 채널이 넘쳐나는 오늘날, TV만 보고도 무엇이든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모순이 재밌었어요."

박 감독은 각색을 '영화화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문학을 통해 인간을 더 깊이 탐구하는 방식으로 여긴다. 그는 "문학이 가진 언어의 결은 영화의 이미지와 만났을 때,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그가 각색의 최고 사례로 꼽은 영화는 '남아 있는 나날'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을 영상으로 옮긴 그 영화는 대사 하나, 시선 하나까지 우아하고 섬세합니다. 그야말로 문학과 영화가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한 예라고 생각해요."

문학, 그중에서도 'K-문학'은 박 감독에게 원천이 아닌, 창작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여전히 변화 중이다.

"원작과 영화 사이에서 저는 계속 여행 중입니다. 목적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정이 매번 설레니까요."

<영상 : 박소라 PD(e1501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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