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경주여행] 5 양동마을과 옥산서원

강시일 기자 2025. 7. 17. 10:5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 옥산서원은 이언적 선생을 배향하는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서편 경주 손씨의 종손 손중돈이 거주했던 관가정.

역사문화도시 경주는 신라천년의 고도이다. 하지만 경주에도 엄연히 고려와 조선 1천 년의 역사 흔적도 두텁다. 경주 북부의 안강과 강동지역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있다.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이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문화유산으로 전 세계 방문객들로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선시대 한옥 형식을 그대로 띤 150여 채의 주택이 초가와 기와로 구성된 양동마을은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양동마을은 조선시대부터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집안에 의해 형성돼 맥을 이어오고 있다.
관가정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양동마을.

◆양동마을 양반길

경주 양동마을 양반길을 걷는 일은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양동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경주 손씨의 종가 관가정과 여강 이씨의 종택 향단이 양대산맥처럼 두 줄기의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더위와 추위를 피해갈 수 있는 매점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연밭을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이 정충각이다. 임진왜란에 맨손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양반과 모시던 주인을 버리고 달아나지 못해 함께 화살받이가 된 충복의 넋을 기리는 비가 나란히 세워진 곳이다. 이어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담 너머 떡이며 옥수수 등의 정을 주고받았던 조선시대를 상상할 수 있다.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600년 된 은행나무, 그 옆에 벼락을 맞아 고사목으로 남은 은행나무도 나란히 서 있다. 악동들의 예절체험학습이 진행되는 관가정은 99칸의 거대한 규모였다. 여전히 높은 곳에서 시원한 전망을 자랑하며, 땅과 하늘 그리고 인간세상의 우주진리를 담은 건축구조는 해설사의 입을 통해 생생히 살아난다.

관가정 후문으로 나서면 집 뒤쪽에 붉은색으로 도배를 한 사당이 시야에 들어온다. 조상을 섬기는 정신은 양동마을 고택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쪽문을 나서 동북방향 건너편에 여강 이씨의 종택 향단이 우람한 규모로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물봉동산을 향해 언덕길을 양반걸음으로 천천히 오르다보면 굴참나무와 대나무숲이 사립문처럼 줄지어 서있다. 악동들의 본부였다는 물봉동산은 펑퍼짐하게 넓은 공터로 남아 있다. 사방에 살구나무가 노란 열매를 달고 있다.
양동마을을 있게 한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난 고택 서백당.

문인화 등의 체험행사가 진행되는 영귀정은 이언적 선생이 공부하던 곳으로 전한다. 설천정사를 지나는 돌담길에는 줄장미가 너울지고, 비비추가 꽃대를 길게 내밀고 있다. 봉선화, 초롱꽃이 불을 밝히는 골목길을 지나면 이언적 선생이 별채로 지은 무첨당이 나타난다. 왼편의 지붕은 날렵하게 끝이 하늘로 치솟은 맞배지붕이고, 오른편은 향사를 담당하는 엄숙한 사당의 형식으로 두 가지 형식이 혼재한 건축이다. 오래된 건축인만큼 처마에는 여러 현판이 걸렸다. 안쪽에 흥선 대원군이 대나무 뿌리로 쓴 '좌해금서'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무첨당을 돌아 다시 오르막의 언덕에 자리한 서백당은 양동마을의 입향조 손소가 지은 경주 손씨의 종가집이다. 우리나라 종가집 중에서도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손꼽힌다. 하루에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뜻을 가진 현판이 눈길을 끈다. 양동마을을 있게 한 고택이다. 서백당의 집터를 잡아준 풍수가 "설창산은 집의 혈맥이 응집된 이 터에서 세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 예언했다. 서백당에서 손중돈, 이언적이 태어났다. 아직 위대한 한 사람이 더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낙선당, 창은정사, 내곡정을 지나 토속적인 골목길을 따라 출출한 허기를 달래줄 우향다옥은 동행한 이지휴 해설사 부부가 운영하는 전통한정식 식당이다. 구수하게 우러나는 된장에 가지, 고추찜, 조기구이, 상추와 쑥갓, 오이냉채, 산나물 무침 등의 밥상을 마주할 수 있다. 흥선 대원군이 곡차를 기울이며 꿈을 다졌던 툇마루에서 그 느낌도 느껴볼 수 있다.
양동마을 양반길 골목의 초가.

◆양동마을 녹색길

양동마을의 안길은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토담으로 연결된 조화를 이루면서 누구나 고향마을의 정취를 느끼는 편안함을 준다. 녹색길 동쪽도 서쪽의 양반길과 같이 나무로 지은 목재건물과 단층으로 된 구조가 부담스럽지 않은 고택이 즐비하다. 집들은 서당과 정자, 고택으로 꾸며졌지만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는 집이어서 더욱 정겨움을 준다. 오래된 집들은 모두 서당과 서원 같은 교육기능을 담당하거나 삶을 영위했던 흔적이 묻어 있는 고택들로 남아 있다.

-안락정은 양동마을 입구 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다. 마루에서 안강들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안락정은 경주 손씨 문중의 서당으로 여강 이씨 문중의 서당 강학당과 함께 양동마을에서 쌍벽을 이루는 서당이다.

-강학당은 여강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지족당 이연상의 아들 경암 이재목의 뜻을 받들어 제자와 족친들이 1867년에 세운 강당이다. 국가급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으며 진입로가 아주 서정적이다. 강학당 뒤편에는 훈장이 거주했던 곳으로 아직 초가가 있다. 초가에서 내려오는 길목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마을의 구조와 안강들이 넓게 들어온다.
이언적을 배향하는 세계문화유산 옥산서원.

-심수정은 마음을 고요한 물과 같이 가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양동마을에서 남은 정자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낮은 위치에 있지만 앞마당을 나와 서남쪽으로 보이는 마을 전경이 좋다. 마당에 오래된 향나무가 용트림하듯 하늘로 치솟는 형상을 하고 있어 건축물의 기품을 높여준다.

-영당과 재실은 동쪽 언덕의 두곡고택 옆에 자리하고 있다. 영당은 수졸당 이의잠의 영정을 모신 건축물이다. 경상도 하양현에 1636년 세웠던 것을 1883년에 지금 위치로 옮겨지었다. 이의잠이 하양현감으로 재직할 때 선정을 베푼 데 대한 보답으로 현민들이 사당을 지었다. 영당과 두곡고택으로 오르는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우물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동호정은 이언적의 넷째 손자인 이의잠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16년에 지은 집이다. 동호는 이의잠의 별호다. 두곡고택과 영당의 재실 사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오르막길을 오르면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향정은 온암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이 1695년에 지은 집으로 집 뒤에 오래된 향나무 두 그루가 있다. 동쪽의 향나무에 단오날 그네를 매달아 민속놀이를 즐겼을 정도로 향나무가 우람하다. 안마당이 넓고 집 둘레에 쌓은 담장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는데 대나무숲과 찔레꽃 등의 야생화들이 피어 인상적이다.
옥산서원 출입문 역락문.

◆옥산서원과 독락당

옥산서원은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도 건재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사적 제154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곳이다. 회재 이언적 선생을 봉향하는 서원으로 도산서원, 덕천서원과 함께 영남 3대 서원으로 손꼽힌다. 옥산서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옥산서원은 경주부윤 이제민이 유림들과 함께 1572년 묘우 체인묘를 비롯 강당인 구인당, 동서재인 암수재와 민구재, 어서각, 경각, 신도비각, 무변루, 역락문 등의 구조로 창건됐다. 창건된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김계휘 계청으로 사액되었는데 편액은 아계 이산해가 썼다. 1838년 화재로 구인당이 소실되자 추사 김정희가 쓴 '옥산서원' 사액을 다시 내렸다. 옥산서원 강당 마루 안쪽에 걸려있는 '구인당' 현판과 맞은편 건물 '무변루' 편액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옥산서원의 어서각은 임금이 하사한 책을 보관한 건물로 보물급 서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옥산서원 옆을 흐르는 자계천에 퇴계 이황이 쓴 글이 남아있는 세심대.

옥산서원과 독락당에는 이언적이 쓰던 벼루와 연수병, 중금, 옥관자, 서각품대, 각품대, 유서통 등의 유품들이 있다. 보물 중종유지, 인종유지, 경상도관찰사유서, 이륜행실도, 황화집, 구인록, 봉선잡의, 중용구경연의, 속대학혹문, 삼국사기 등이 전하고 있다.

독락당은 이언적이 관직에서 물러나 옥산리에 지은 살림집 사랑채 이름으로 '옥산정사'라고도 한다. 보물 제413호다. 이곳에는 원래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지은 서재 역락재가 있었다. 이언적이 죽고 서자로 알려지고 있는 둘째 아들 이전인이 안채를 중수하고 어서각과 사당을 세웠다. 이전인의 아들 이준은 1572년 안채를 중수하고, 지방유림들과 옥산서원을 세워 이언적을 배향했다.
이언적 선생이 기거하던 옥산정사의 계곡에 연접해 지은 계정.

이언적은 중종 27년(1532년) 김안로의 서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의 탄핵을 받고 경주로 내려와 안강 자옥산 계곡 독락당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학문에 침잠했다. 공은 독락당 주변의 자연풍취에 대해 사산오대(四山五臺)를 명명했다. 자옥산과 도덕산, 화개산, 무학산, 그리고 탁영대, 징심대, 관어대, 영귀대, 세심대 등이다. 세심대(洗心臺)는 옥산서원과 독락당 사이로 흐르는 자계천 개울에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 너럭바위에 이름이 지금까지 새겨져 있다. '세심대'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는 이언적의 성리학을 이어받은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독락당 정면에 걸린 편액 '옥산정사'의 글도 퇴계 이황이 썼다. 이황의 흔적은 옥산서원과 독락당에 많이 남아 있다.

독락당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물이 계정이다. 작은 규모의 정자로 지어졌지만 누각에 앉으면 활짝 열린 계곡의 그림 같은 전경이 시야로 와락 안긴다. 자연과 절묘한 공간을 연출해 계곡의 물이 흐르는 바위에 앉은 느낌이 들게 하는 공간으로 이언적이 학문을 하다 잠시 쉬는 곳으로 활용했던 대표적인 정자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역사문화도시 경주를 소개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