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투성이인 세상에 내 詩가 도움이 될까?
육체적인 것인지 마음의 병인지
알 수 없는 아픔에 시달리는 우리
모두 가슴에 ‘금잔화 한 포기’ 꽂자
작은 희망 한 줌, 결국 위로가 된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1940. 12.

윤석열 전 대통령이 두 번째로 구속됐다. 이 뉴스를 보고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퇴임 후 법정에 서지 않은 전임 대통령을 찾기가 힘들 정도라 이러한 풍경이 익숙해서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분명 병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마음의 병을 앓는데 스스로의 병을 모르고, 스스로 병자임을 알더라도 그 원인과 치료법을 모른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병원인지도 모른다.
윤동주도 1940년 12월, 유사한 문제 의식을 담아 ‘병원’이라는 시를 썼다. 세상을 병원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병원 뒤뜰의 여인은 살구나무 그늘 밑에 누워 있다. 흰 옷, 하얀 다리는 이 여인이 세상에서 소외된 상태임을 암시한다. 가슴을 앓는다는 말은 폐 질환을 앓는다는 뜻일 수도 있고 마음의 병을 앓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누워 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세상에서 단절된 고독의 공간이 차갑고 삭막한 흑백 필름처럼 펼쳐진다.
2연에서 화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정체불명의 아픔에 오래 시달리다 이곳을 찾아왔는데,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은 윤동주의 산문 ‘화원에 꽃이 핀다’에 나오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주는 스승이 있다면 (···)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병이 없다는 진단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지나친 시련과 피로를 안겨준다. 화자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끼며 “성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이때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서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금잔화의 노란색은 흑백의 병원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하고 생명력 있는 색채로 다가온다. 여인은 금잔화 한 포기를 보며 어떤 위로를 느꼈던 것일까. 이 장면을 보며 화자는 그녀와 자신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동병상련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이 누웠던 자리에 자신이 누워 본다. 이는 단순한 연민을 넘어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렇게 화자는 타인을 통해 자신의 고립을 넘어서는 길을 발견한다.
사회는 거대한 병원이고 우리는 저마다 병을 앓고 있다. 어지러운 현실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분이 치밀지만, 나약한 개인은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공간에서 윤동주가 발견한 희망의 씨앗은 일상 속의 작은 위로와 연민이다. 금잔화 한 포기가 주는 소박한 위로, 동질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연민이 삭막한 세상을 견디는 힘이 된다.
어쩌면 세상은 영원히 우리에게 거대한 병원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시가 우리에게 은은하게 빛나는 금잔화로 다가와 삶의 고단한 순간마다 위로를 건네준다는 사실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기 위해 이 시를 썼지만, 그 시가 시대를 건너뛰어 지금의 우리를 위로한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제목... 원래는 ‘병원’으로 하려고 했다
윤동주는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 때 세 편의 작품을 노트에 쓴 후 쉬지 않고 작품을 써서 기록했다.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를 다니던 1936년과 1937년에 가장 많은 작품을 써서 이 시기의 작품 수가 70편 가까이 된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작품 편수가 줄어드는데, 창작에 신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1938년 가을까지 작품을 쓰고 1년 가까운 휴식기를 거쳐 이듬해 9월에 ‘자화상’ 등 몇 편의 작품을 썼다. 그 이후 다시 긴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1940년 12월에 ‘위로’와 ‘병원’을 썼다. 두 번째 공백기는 1년 3개월이 된다. 그 이후에는 다시 시작의 리듬을 되찾아 1941년에는 16편의 작품을 썼다. 이를 통해 연희전문 2학년과 3학년 때 윤동주가 창작의 갈등을 겪으며 진통의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진통의 시간을 넘어서면서 완성한 작품이 ‘위로’와 ‘병원’인데, 자신이 계획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병원’만 수록하고 ‘위로’는 수록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윤동주가 자신의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후배 정병욱에게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인데 병원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니 내 시가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 말에는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헌신의 자세가 담겨 있다. 자신의 시를 도구로 삼아 병든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효용적 태도를 밝힌 것이다. 두 번째 공백기를 지나며 쓴 ‘병원’에 윤동주의 문학관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문 찾아다니며 원고 모아... 일평생 윤동주 알린 두 동생
여동생 윤혜원, 남동생 윤일주
윤동주에게는 여섯 살 아래의 여동생 윤혜원, 열 살 아래의 남동생 윤일주, 열 여섯 살 아래의 남동생 윤광주가 있다. 이 중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윤동주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는 데 공헌한 사람은 윤일주(1927~1985)와 윤혜원(1923~2011)이다.


해방 후 1946년 6월 중국 지린성 용정을 떠나 서울로 온 윤일주는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문들을 찾아다녔다. 형의 동기 강처중을 만나 형이 남긴 물품과 시 원고를 받았고, 형의 후배 정병욱을 만나 그가 보관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필 원고를 받았다. 이들은 어렵게 모은 31편의 시를 정지용 시인에게 전달하고 서문을 부탁했다. 윤일주는 정지용을 만나 형의 개인적 면모를 이야기했다. 이때 윤일주는 20세의 서울대 건축과 1학년 학생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윤일주는 고향 집에 형이 남긴 자필 원고 묶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집이 나오기 전인 1947년 4월 용정에 연락해 누이 윤혜원에게 형의 원고와 자료를 전부 갖고 서울로 와 달라고 했다. 막 결혼한 상태였던 윤혜원은 해방 조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1947년 6월에 용정을 떠난 윤혜원 부부는 두만강을 건너고 청진, 원산을 거쳐 38선을 넘어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2월에 기적적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윤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 자필 원고가 포함된 개정판은 1955년에 나왔다. 이 시집에는 시 89편과 산문 4편이 수록되었다. 첫 시집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작품이 실리게 된 것은 윤혜원의 공이다.
1976년에 재개정판을 낼 때는 1955년에 보류했던 23편을 추가하여 112편을 수록했다. 1983년 최종 개정판을 내면서 윤일주는 “앞으로 윤동주에 관한 인용, 비판 등은 이 책에 의존해 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이 말에는 억울하게 죽은 형의 원고를 모으고 지키고 출간하면서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온갖 정성을 바친 동생의 진심이 압축되어 있다. 윤일주의 본업은 건축학자였지만, 형의 문학 정립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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