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55)] 용현동 당구장이 배출한 현역 전설 김가영입니다

박경호 2025. 7. 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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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당구의 GOAT(Greatest Of All Time)… “365일중 360일 훈련, 우승 다음 날만 쉬었죠”

지난 11일 오후 경기도 고양의 개인 연습장에서 만난 LPBA 김가영 선수가 캐롬 3쿠션 시범을 보이고 있다. 김가영 뒤로는 그가 수상한 우승컵들이 진열돼 있다. 2025.7.1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우승, 우승, 우승, 우승, 우승, 우승, 우승, 우승’.

당구 역사에서 김가영이란 페이지를 펼치면 가장 첫 줄에 나오는 문장일 테다. 당구 여제 김가영은 캐롬 3쿠션 경기를 진행하는 프로당구 LPBA 투어에서 ‘8회 연속 우승’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프로당구 통산 15회 우승으로, 남녀 통틀어 따라올 선수가 없는 압도적 성적이다. 성적으로 보나 기록으로 보나, 프로당구 여성부 최초로 7억원을 돌파한 누적 상금으로 보나, 현재 LPBA에서 김가영의 라이벌은 김가영 그 자신뿐이다.

지난 11일 오후 프로당구 전용 경기장 ‘PBA 스타디움’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인근 개인 연습장에서 김가영을 만났다. 2025~2026 시즌 2차 투어(6월29일~7월6일)인 ‘하나카드 LPBA 챔피언십’ 대회가 끝나기 전 잡힌 인터뷰 일정이었다. 9연승을 축하하는 자리를 기대하기도 했으나, 김가영은 이번 대회 준결승에서 잠시 쉼표를 찍었다. 며칠 전 경기의 소감부터 물었다.

안양 출생… 초2때부터 인천에서 살아
당구장 운영 부친 영향, 일찍부터 레슨
“제가 4구 400점 칠때, 아버지 2000점”

“계속 이기고 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저는 눈앞에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려 하는 것이에요. (패배가) 제 인생에서 처음이라면 크게 와닿을 수도 있는데, 워낙 선수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과연 무슨 문제로 이번 경기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지 못했을까, 그 부분을 어떻게 채울까’가 주된 관심이죠.”

내후년이면 ‘선수 생활 30년’을 맞는 베테랑다운 답변이다. 오는 22일부터 시작되는 ‘웰컴저축은행 PBA 팀리그 2025~2026’ 개막전에 대비해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김가영을 당구 선수로 성장시킨 곳은 어디일까. 그가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이라고 말하는 인천이다. 김가영의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여전히 가족들은 인천에 살고 있다.

지난 11일 오후 경기도 고양의 개인 연습장에서 만난 김가영 선수가 15개의 LPBA 우승컵을 보여주고 있다. 2025.7.1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가영은 1983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안양, 부천 등지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인천에서도 몇 차례 학교를 옮겼다. 부모님은 딸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구장을 운영했는데, 당구장을 옮길 때마다 이사했기 때문이다. 당구 큐를 처음 잡은 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캐롬(4구)부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용현동(미추홀구)에서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당구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는 유도 선수 출신이고 지도자를 꿈꿨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당구 레슨을 제대로 받았어요. 처음에는 당구를 잘한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제가 4구 당구에서 400점 정도 칠 때 아버지는 2천점을 쳤으니까요. 저희 당구장을 찾는 동네 아저씨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그런 줄 알았던 거죠.”

유도선수 출신 부친, 선수로 키울 결심
“중학부터 매일 고강도 근력·체력 훈련”
고교때 포켓볼 국내 1위… 대만 진출도

김가영의 재능을 포착한 아버지는 딸을 당구 선수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이때부터 김가영은 세계적으로 대회가 활성화한 포켓 당구로 종목을 바꾼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97년 처음으로 대회에 출전했다. 성인부 대회였다. 김가영은 이듬해 국내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고, 국가대표로 뽑혀 아시아선수권대회와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선수 등록을 한 지 7개월 만이었다. 비결은 ‘아버지의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당구를 스포츠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스포츠라고 생각했어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체력 훈련을 하는 당구 선수는 없었고 지금에서야 그러한 훈련들을 하는데, 저는 중학생 때부터 근력과 체력 훈련을 했어요. 저희 아버지가 딸을 ‘스포츠 선수’로 키운 것이죠. 농담이 아니라 정말 365일 중 360일을 훈련했어요.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은 우승한 다음 날이에요. 준우승하면 못 쉬었습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은 집과 당구장, 대회장만 오간 기억이 전부다. 고등학교부터 이미 국내 랭킹 1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한국 밖에는 적수가 아주 많았다. 김가영은 고교 시절 세계 정상급 포켓 당구 선수였던 대만 출신 류신메이(劉信美·1969년생)에게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01년 고교 졸업반이던 김가영이 대만으로 진출한 건 류신메이를 이기고자 했던 마음도 컸다. 세계 무대에서 당구를 경험하고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고2 때부터 대만에서 개최된 대회에 초청받았어요. 당시 아시아당구연맹 회장이기도 했던 대만당구연맹 회장이 대만 활동을 제의하기도 했고요. 포켓 선수 생활 중 당구가 가장 많이 늘었던 시기였어요. 대만에선 하루에 16시간씩 당구를 쳤으니까요.”

‘돈 떨어지면 돌아가자’ 미국 무대 도전
세계선수권 제패… 2009년 WPBA 1위
도하·광저우 아시안게임 출전 銀 성과

김가영이 대만 당구계를 평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자신의 우상 류신메이를 넘어섰다. 특유의 쾌활한 성격과 유창한 언어로 대만 방송에도 출연했다. 김가영은 대만 진출 2년 만인 2003년 꿈의 무대인 미국으로 향한다. 목표는 세계 최강자인 앨리슨 피셔(Allison Fisher·1968년생)와 캐런 코어(Karen Corr·1969년생)였다.

한화 200만원을 들고 대만으로 갔었다. 돈이 떨어지면 귀국할 생각이었는데, 대만 랭킹 1위를 차지하니 돈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진출할 때는 통장에 한화 2천만원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돈이 떨어지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은 만만치 않은 무대였다. 신인 김가영은 낮은 랭킹으로 인해 예선에서 주로 어려운 상대들을 만났다. 수중에 500달러 정도만 남았던 2003년 9월 마침내 US오픈 준우승이란 성과를 냈다. 결승에서 만난 캐런 코어에게 안타깝게 졌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희망을 봤다. 이듬해 김가영은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하면서 세계 정상급 선수로 올라섰다.

김가영은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포켓 8볼 경기에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도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이 시기 선수 인생의 첫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도하아시안게임 포켓 당구 경기에서 대만 팀과 맞붙은 한국 대표팀 선수의 통역을 잠시 해줬는데, 그 경기에서 대만 선수가 역전패했다. 이후 대만당구연맹은 구체적인 근거 없이 김가영에게 대만에서 2년 간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김가영은 그때 사건을 떠올리면서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여왕의 귀환’은 2013년 3월이었다. 김가영은 인천시체육회에 입단해 전국체육대회 등 국내 대회에 집중했고, 실내무도아시안게임 등 국제 대회에서도 여전히 활약했다.

“오랫동안 외국에 있다가 돌아왔는데도 인천시가 가장 먼저 저를 불러줬어요. 다른 선수가 없던 게 아니었거든요. ‘인천 대표는 김가영이 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요. 부모님도 인천에 계시고, 친구들이 다 인천에 있는데, 다른 지역 대표 선수가 된다는 게 좀 이상한 거죠.”

세계 정상급 포켓 당구 선수 김가영이 캐롬 3쿠션 프로당구 선수로 전환한 것은 ‘타의’였다. 두 번째 고비였으나, 현재 프로당구를 평정한 김가영을 본다면 새옹지마였다. 2019년 프로당구협회(PBA)가 출범하면서 김가영은 초청 선수 자격으로 LPBA 투어 개막전에 출전했는데, 대한당구연맹이 그의 선수 등록을 말소했다.

선수들 돕고자 LPBA 출범 개막전 출전
대립하던 대한당구연맹서 제명 ‘희생양’
3쿠션 전향… 8연속 우승, 압도적 기록
“용감하면서 꾸준히, 쉽지 않지만 중요”

PBA와 대한당구연맹이 대립하는 가운데 당구계 대표 선수인 김가영이 희생양이 됐다는 시각이 많다. 사실상 영구제명된 김가영은 인천시체육회를 나와 20년 넘게 몸담은 포켓 당구를 포기하고 LPBA 3쿠션 선수로 전향했다.

“프로당구협회가 생기는데, 그 대회에서 한번 도움을 주느냐 마느냐가 저에겐 어려운 결심이었어요. 3쿠션 선수가 되느냐 마느냐는 제 선택이 아니었고요. 프로당구가 출범하고 흥행에 도움이 될 만한 이름난 선수가 필요한데, 제가 3쿠션을 칠 줄 아니까 좋은 취지로 첫 대회에만 한번 도움을 준 것이었어요. 기존 당구계는 저처럼 전국체전에 참가하는 선수들만 먹고사는 시스템이었어요. 연봉을 받는 시도연맹 소속 선수는 몇 명 없거든요. 프로당구협회가 생기면 그래도 당구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는 선수들이 조금 더 많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죠. 저는 포켓 당구 선수를 할 생각이었지 3쿠션에 진출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당시로선 김가영에게 프로당구는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하나뿐인 선택지였다. 김가영은 포켓에서 3쿠션으로 종목을 바꾸는 과정을 “도화지에 여러 색깔로 그려져 있는 그림을 다 지우고 다시 그리는 기분”이라고 했다.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가영은 LPBA 데뷔 첫해인 2019~2020 시즌 한 차례 우승했다가 2020~2021 시즌에선 준우승 2차례로 숨을 고르는 시기를 가졌다. 다음 2021~2022 시즌부터 우승 행보가 이어졌다. 김가영의 고양 연습장 한쪽 벽면에 있는 테이블은 LPBA 우승컵과 PBA 골든큐 트로피로 가득 찼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연승 질주에 우승컵을 놓을 여유 공간을 미처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꾸준함과 용감함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꾸준하게 하는 건 다들 잘할 수 있는 건데, 용감함을 잃지 않으면서 꾸준하게 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잘 버티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나오는 날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가영은 프로당구의 간판 스타다. ‘김가영의 라이벌은 김가영’이란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먼저 따라하고, 그 다음 제 스타일을 찾았죠. 지금의 저는 어떠한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고, 그 모습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 모양을 어떻게 그리는지는 저에게 달려있는 거고요.”

이날 김가영은 인터뷰를 마치고, 인천에서 오는 가족들을 기다렸다. 저녁 식사를 약속했다고 한다. ‘김가영에게 인천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다소 식상한 질문을 마지막에 던졌다. 김가영은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 제 기억의 시작은 인천이고, 지금도 가장 많이 가는 곳. 가족과 친구가 있고, 내비게이션 안내가 없어도 갈 수 있는 곳. 가장 친숙한 곳”이라고 답했다.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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