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만에 반도체 생태계 재진입 노리는 LG전자…한미반도체가 경계?
한화세미텍 진출로 깨진 한미 독점 구조에 LG마저 출사표
(시사저널=허인회 기자)

LG전자가 반도체 장비 시장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꿈의 반도체 장비'로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용 하이브리드 반도체 접합 장비(본더) 개발에 나선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강제적인 구조조정으로 반도체 시장을 떠난 LG가 25년 만에 다시 반도체 생태계에 발을 들이는 셈이다. 본더 시장에도 전운이 감돌고 있다. 당장 독점적 사업자 위치에 있는 한미반도체가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다"며 경계심을 드러내는 등 HBM용 반도체 장비 시장에 지각변동이 예고되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LG전자는 이달 초 '나노코리아 2025' 전시회에서 반도체 패키징 장비를 공개하며 차세대 HBM 제조에 핵심이 되는 하이브리드 본더 개발에 착수했음을 밝혔다. 연구개발은 LG전자 생산기술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업계에선 2028년 개발 완료를 목표로 보고 있다.
LG그룹에 있어 반도체는 '아픈 손가락'이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정부의 '빅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LG반도체 지분을 현대전자에 넘겨야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스템반도체 중심의 LG반도체와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현대반도체가 합병해 하이닉스가 탄생했다. 이후 하이닉스는 2011년 SK그룹에 인수돼 현재의 SK하이닉스가 됐다.
LG전자가 반도체 제조 시장에서 철수했지만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었다. 연구개발 조직인 시스템반도체 센터(SIC)를 통해 반도체 설계 명맥을 이어왔다. 반도체를 판매하지는 않지만 자체 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방식이다. 설계 역량을 이어오다 2023년엔 자체 온디바이스 AI칩 'DQ-C'를 개발했고, 지난해엔 AI 반도체 스타트업인 텐스토렌트에 투자를 결정, 시스템반도체 설계 역량을 지속 강화하고 있다. 다만 그동안은 AI 기반의 자사 제품과 서비스에 특화된 칩 개발에 몰두했다면, 이번엔 반도체 장비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LG전자가 하이브리드 본더 개발에 뛰어든 이유는 기업간거래(B2B) 사업 강화 측면도 있다. LG전자는 자동차 전자장치(전장), 냉난방공조(HVAC) 등 B2B 기업으로서의 체질 전환에 나서고 있다.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할 수 있고, 가전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브리드 본더 개발 역시 이 같은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현재 HBM 생산 공정에선 TC본더가 사용되고 있다. TC본더는 HBM용 D램을 쌓을 때 열과 압력을 가해 칩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 역할을 하는 핵심 장비다. LG전자가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하이브리드 본더는 HBM을 쌓아 올릴 때 하나로 엮어주는 장비로, 칩 사이 단자(범프) 없이 D램을 완전히 포개 칩 간 간격을 줄일 수 있으며, 발열도 줄어든다. 기존 열압착(TC) 방식보다 칩 적층 간격을 줄여 더 얇고, 고성능의 패키징이 가능해 차세대 AI 반도체에 필수적인 기술로 꼽힌다. 하이브리드 본더가 TC본더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꿈의 장비'로 불리는 이유다.
현재 네덜란드 베시와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하이브리드 본더 선두 업체로 꼽히고 있다. 다만 낸드플래시·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만 적용되고 있을 뿐 아직 HBM에선 상용화되지 않았다. 기술 개발에 성공할 경우 빠른 매출 확대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아울러 HBM 생산을 주도하고 있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장비 현지화에 관심이 높아 도입 가능성도 상당하다. HBM용 하이브리드 본더 개발에만 성공한다면 시장 선점은 물론 반도체 장비 시장의 강자로 떠올 수 있다는 관측이다.
시장 전망도 나쁘지 않다. 시장조사업체 베리파이드마켓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하이브리드 본더 시장은 2023년 7조2500억원 규모에서 2033년 19조3400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갈수록 늘어나는 HBM 수요에 따라 하이브리드 본더 수요도 덩달아 늘어날 것이란 분석인 것이다.

HBM 본더 시장, 경쟁으로 판도 바뀌나
현재 HBM 본더 시장은 한미반도체가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미반도체는 2024년부터 현재까지 엔비디아향 HBM3E용 시장에서 90%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2027년 말까지 HBM4, HBM5 시장에서도 95% 점유율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독점 구조에 균열이 생겼다. 한화그룹 계열 반도체 장비업체인 한화세미텍이 지난 3월부터 SK하이닉스에 HBM용 TC본더를 공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화세미텍은 2020년 TC본더 개발을 시작해 4년 만에 SK하이닉스의 품질 검증 테스트를 통과하고, 본격적으로 공급에 나서고 있다. 이에 한미반도체가 장비 단가를 인상하고 상주하던 엔지니어를 철수하는 등 SK하이닉스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SK하이닉스가 한미반도체와 추가 공급계약을 맺으며 갈등은 일단락됐다. 한미반도체가 경쟁 업체의 시장 진출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LG전자마저 본더 시장 진출을 선언하자 한미반도체가 견제에 나섰다. 지난 15일 곽동신 한미반도체 회장은 보도자료를 통해 "하이브리드 본더는 대당 100억원 이상으로 열압착(TC) 본더의 2배가 넘는 고가 장비"라며 "HBM4와 HBM5 생산에 하이브리드 본더를 도입하는 건 우도할계(牛刀割鷄)"라고 밝혔다. 우도할계는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필요 이상의 큰 도구를 사용할 때 쓴다. 그러면서 "HBM4와 HBM5 모두 한미반도체 TC본더로 제조가 가능해 고객들이 가격이 두 배가 넘는 하이브리드 본더를 선택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LG전자가 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하이브리드 본더는 HBM6용이다. 그럼에도 '우도할계'와 같은 사자성어를 거론한 것은 한화세미텍의 시장 진입에 이어 LG전자의 하이브리드 본더 개발 돌입에 대한 경계심을 표했다는 것이 업계의 시선이다.
곽 회장 또한 "2027년 말 출시를 목표로 HBM6용 하이브리드 본더를 개발해 시장에 선제적으로 대비해 지속적인 시장 우위를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HBM6를 기점으로 반도체 장비 시장의 경쟁이 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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