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다시 평화] 평화의 시작은 기억과 인정
이승만 정권 은폐·훼방 끝에 드러난 '거창사건'
상대적으로 소외된 '산청·함양 사건' 현재 진행형

한센인을 상대로 치유 활동을 전개하던 김 전 교수는 사회복지시설 성심원과 인연을 시작으로 산청 중심 지역학 연구 활동까지 활동 반경을 확장했다. 이때 우연한 계기로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 전모를 추적하기 시작한 그는 지난한 연구 끝에 사건이 '은폐'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산청·함양·거창 사건은 하나 = 1980년대 중반 분출된 민주화 열망을 계기로 국가 폭력 진상과 피해자 명예 회복 요구도 쏟아졌다. 경남에서는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재조명 받았다. 1951년 2월,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거창군 신원면 주민 719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시신을 불로 태우고, 계엄령을 내려 시선을 막은 뒤 암매장하는 등 은폐도 모자라 적대세력과 전투로 희생된 것이라고 왜곡했다.
1951년 3월,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이 폭로하면서 묻힐 뻔한 사건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군은 병력을 적대세력으로 위장해 합동진상조사단을 방해했고,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적대세력에 협력한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했다는 식으로 사건을 축소하고 왜곡했다.
그나마 세상에 알려진 거창 사건도 정권 은폐와 훼방으로 긴 시간 조명받지 못했으니 그보다 앞서 벌어진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은 오죽할까. 거창 사건 전조 현상과도 같았던 '하나의 사건'이지만 집중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서조차 산청·함양 사건은 '등'에 포함될 뿐이다.
"학계도 이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산청·함양 사건 진상이 밝혀졌다는 반응인데, 진화위가 규명한 사건은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범주가 다릅니다. 당시 군사 기록도 두 달치가 사라져, 철저하게 잊힌 사건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죠."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사상을 통제하겠다며 만든 반공단체인데, 정부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보도연맹원들을 불법적으로 체포·구금하고 집단학살했다.

◇증언, 잊힌 기억의 서사 = 김 전 교수는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전모를 밝힌 기존 연구 기록집에서 군사재판 기록을 샅샅이 살폈다. 산청·함양 사건에 해당하는 기록을 발췌하고 증언 등 자료와 교차 검증해 마침내 '증언, 잊힌 기억의 서사'라는 이름으로 논문 두 편을 발표했다. 첫 논문에서 그는 "집단학살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73년에 이르고 있으니 최소한 그 사건은 과거가 되지 못하고 영원한 현재에 머물러 있다"고 규정했다.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은 발생 74년 만인 지난해 12월 첫 국가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유족 15명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으로, 1심 재판부는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결과가 뒤집혔지만, 정부는 곧바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철저하게 잊힌 사건이지만 국가와 피해자는 알고 있죠. 국가는 추모공원을 세운 것으로 모든 배상에 갈음한다는 형식을 취했다고 판단해요. 추모공원을 세웠으니 일견 평화를 찾은 것처럼 보이겠죠. 그러나 평화는,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국군 산청·함양 사건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 진상은 여전히 규명 대상이다. 1950년 한국전쟁 시작 직후 광주형무소에 갇혔던 사회주의 활동가와 국민보도연맹 소속 민간인 등 3000여 명이 학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최근인 2022년으로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이런 과거 국가폭력 진실을 밝혀야 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5월 2기 조사 기간이 완료됐다. 조사 기간을 1년 연장했지만 결국 전체 10.1% 수준인 사건 2000여 건 조사가 중단됐다. 특히,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김광동 전 위원장이 '전시에는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취지 발언을 해 공분을 사는 등 실질적 역할에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는 최근 국정기획위원회에 연내 3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국정 과제로 삼아달라고 요구했다. 조사 기간은 최소 5년으로 연장하고 2기 때 접수된 사건을 모두 승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바람대로 이재명 정부 인수위원회 역할인 국정기획위가 3기 진실화해위 출범을 신속 과제로 선정해 올해 이행을 추진하기로 했고, 국회에도 진실화해위 연내 출범 등 내용이 담긴 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김 전 교수는 '증언, 잊힌 기억의 서사' 두 번째 논문에서 정부의 공식 사과와 인정만이 학살 생존자와 유족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신속한 진실 규명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정부가 학살을 인정하는 것만이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정부와 지자체가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학살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할 때 비로소 잊혀서는 안 될 역사가 살아있는 역사가 되겠지요. 사건 자체를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도 분명히 진상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기억하고 인정할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최환석 기자
※ 이 기사는 지원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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