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두려운 건 서로의 부재…고통스럽지만 엄청난 멜로죠”

정시우 객원기자 2025. 7. 1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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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밤’ 한예리

- 권여선의 동명소설 영화화
-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듬는
- 영경과 수환의 애잔한 사랑

- 마치 詩와 같은 영화적 스타일
- 친절하진 않지만 마음 흔들어

- 무용수 출신다운 비언어적 표현
- 영화에서 소중하게 쓰이는 자산
- 댄싱9 우승자인 남주 김설진도
- 몸의 언어 믿는 한예리가 추천

권여선 작가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봄밤’은 요양원에서 살아가는 커플 영경(한예리)과 수환(김설진)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경은 벼랑 끝에 선 알콜 중독자이고, 수환은 하루하루 몸이 바스라져 가는 류머티즘 환자다. 술을 자제하지 않으면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환은 그런 영경이 마음 편하게 요양원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배웅과 마중을 반복한다.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랑.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보듬는 사랑. 이 슬픈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으로 다가온 이유다. 한예리가 끄덕였다. “고통스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엄청난 멜로라고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색다른 사랑 이야기 ‘봄밤’

영화 ‘봄밤’의 주연을 맡은 배우 한예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주)시네마달 제공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한예리는 아직 ‘봄밤’이 전하는 여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봄밤’은 한예리가 자신의 장편 데뷔작 ‘푸른 강은 흘러라(2009)’에 이어 다시 강미자 감독과 호흡 한 작품이다. 서사보다는 시적 이미지와 배우들의 얼굴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봄밤’의 영화적 스타일은 관객들에게 그리 친절하진 않다. 그런데 이 친절하지 않은 영화가 자꾸 마음을 흔든다. 반복되는 이미지와 암전이 시의 ‘행’과 ‘연’처럼 작용해 영화 자체를 시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봄밤’은 수환과 연경 두 사람의 에너지가 중요한 영화다. 서사도 많이 축약돼 있기에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한예리는 수환 역 캐스팅을 고심하는 강미자 감독에게 ‘댄싱9’ 우승자 출신의 연기자 김설진을 추천했다. “혹독하게 살을 많이 빼야 하는 상황인데, 그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고민했다. 뭔가 신체적인 한계를 밀어붙여 봤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싶었고, 자연스럽게 설진 오빠가 떠올랐다. 무용이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일정 시간 육체적으로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있다. 그걸 감내했던 사람들의 끈기를 저는 믿는 편인데, 오빠는 그런 시간을 버텨낸 사람이기에 의심이 없었다.” 한예리와 김설진은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 동기로 만나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 온 사이다.

‘봄밤’에서 영경과 수환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건, 상대가 부재한 세상이다. 두 사람은 왜 그렇게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을까. “상대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강하게 봐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서로가 감지했고,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라도 상대에게 기댈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한예리는 이런 연경과 설진의 사랑을 “대단한 사랑”이라고 명명했다.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은 이 사랑만으로도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기에 정말 큰 사랑”이라고.

무용을 했던 사람들은 육체적 고통을 견디는 시기가 있다고 말한 한예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연기자는 어떤 시간을 필수적으로 지나게 되는지. 이에 대해 그녀는 “연기자는 사람을 이해하고 견뎌내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고 응답했다. 그 시간은 사람 한예리의 삶을 조금 더 살찌우는 게 분명해 보였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그 캐릭터를 이해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넓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가령 지하철에서 화를 내는 사람을 보고 어릴 땐 ‘왜 저렇게 짜증을 낼까?’ 했다면, 연기를 하면서부터는 ‘저 사람, 지금 사는 게 너무 힘들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을 알게 되면서 사람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달까. 그런 사고를 하게 해주는 지점들이 너무 고맙다.”

연기를 하며 타인을 더 이해하게 됐다는 한예리.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다면 지금 다른 류의 배우가 돼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한예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뭔가를 늘 늦게 깨우치는 사람이다. 무용할 때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잘 던진 적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을 잘 돌아보는 친구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못됐다. 그러다가 연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내게 질문하기 시작했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게 됐다. 그렇기에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했다면, 아~주 다른 배우가 돼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무용수로 살 것이라 짐작했던 한예리의 인생 계획은 한예종 영화과 학생들의 작업을 도와주는 것을 계기로 크게 방향을 틀었다. 또래 배우들보다 늦게 시작한 연기지만, 출발 후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독립영화계가 그녀를 환대했고, 눈썰미 좋은 상업영화 감독들이 그녀에게 구애를 보냈다. “늦게 연기를 시작했기에 제 고유한 것들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무용할 때도 그랬다. 신체적으로 제가 특출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저만의 독보적인 뭔가를 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은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살아남아야 하기에. 덕분에 영화를 시작했을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이기 때문에 좋은 것, 이런 것들을 더 빨리빨리 캐치했던 것 같다.”

한예리만이 할 수 있는 것. 한예리이기에 좋은 것. 흥미롭게도 그건, 그가 콤플렉스를 이겨내려 부단히 노력했던 무용에서도 온다. 언제고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무용으로 추상을 표현하는 습관이 되어 있어서인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그리는 일에 익숙한 편이다”고 말했는데, 실로 그녀의 비언어적 표현은 영화에서 늘 소중하게 쓰인다.

▮자신의 시를 쓰고 싶은 배우

영화 ‘봄밤’의 한 장면. (주)시네마달 제공


2005년 단편영화 ‘사과’로 데뷔한 후 쉼 없이 작업을 이어 온 한예리. 그런 그녀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이런 배우다’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영화 세 편만 뽑으면 뭐가 있을까. 그녀가 첫 번째로 뽑은 영화는 상업 영화 데뷔작인 ‘코리아’(2012, 문현성 감독)였다. “그때는 에너지 진짜 넘칠 때였다. 체중도 많이 불린 시기여서 힘이 좋기도 했다. 극강의 에너지를 가진  저를 만날 수 있으실 거다.”

두 번째 그녀의 픽은 서울 서촌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한 여자와 그를 둘러싼 세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던 ‘최악의 하루’(2016, 김종관 감독)다. 영화에서 그녀가 연기한 은희는 관계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작은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여자를 통해 영화는 거짓과 진실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맡았던 캐릭터가 선하지만은 않아서 좋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모든 사람에겐 다양한 면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을 건드리는 묘한 쾌감이 있는 영화다.”

마지막으로 꼽은 작품은 할리우드 진출작인 ‘미나리’(2021, 정이삭 감독)다. “그 시대 여성의 삶과 모성애가 잘 반영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런 부분이 잘 그려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저희 세대보다, 어머님 세대의 분들이 공감을 많이 해 주셨다.”

한예리는 최근 15년간 몸담았던 ‘사람엔터테인먼트’와의 동행을 마무리했다. 한 소속사와 오랜 시간 협업을 한 셈인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녀는 “나의 어떤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인연을 빨리빨리 치워버리는 게 잘 안된다”고 답했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이유에 대해서는 “제 안에서 뭔가 큰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1차적으로 들었다. 다른 방향으로 성장이 좀 필요한 시기가 왔다는 느낌이랄까. 마흔을 기점으로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부언했다.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봄밤’에서 영경은 김수영의 시 ‘봄밤’을 여러 번 읊는다. 훗날 한예리의 삶을 그린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 영화에 넣고 싶은 시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만약 그런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직접 시를 쓰고 싶다. 나의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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