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윤봉길 의사 홍커우 의거 숨은 기획자는 김철이었다. [전남 함평 일강 김철기념관-下]

1931년은 격동의 해였다. 그해 7월 한국과 중국 농민들이 유혈 충돌한 만보산 사건에 이어 9월 18일에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 만주사변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축소되고, 일부 변절자도 발생했다. 이래저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곤경에 처했다. 국내에서의 지원도 뜸해졌고, 중국 국민당 정부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았다. 김철 등 임정 지도부는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임정의 돌파구는 특무조직, 즉 비밀 무장단체였다. 요인 암살 등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의 창설이었다. 한 해 전인 1930년 12월 다시 군무장(지금의 국방부장관)에 재임용된 김철은 비밀리에 김구와 접촉, 특무조직 건설에 나섰다. 일단 모든 특무공작에 관한 결정과 책임은 백범 김구에게 위임했다.
임시정부도 정부 기관이다보니 암살 등 비밀임무를 수행하다 드러날 경우 외교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높았다. 백범도 임정 국무위원(재무장)에 상해거류민단 단장이었지만 김구 개인 조직처럼 포장했다.
임정 국무원(지금의 행정부)도 자금조달, 단원선발, 공격 대상 결정 등 일체의 공작업무에 관여하지 않았다. 오직 임무의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만을 보고받았다.
# 임정 특무조직 비밀리에 출범
특무조직은 1931년 11월, 한인애국단으로 출범했다. 한인애국단의 출범과 회의 장소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한인애국단원들이 거사 전 선서식과 기념촬영을 한 장소는 알려져 있다. 당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중국 정부로 부터 얻은 조차지역)베이러에 있던 '신텐상리' 라는 작은 동네였다. 이 곳에 김구의 최측근인사로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집이 있었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기거하던 김구는 걸어서 10분 거리인 공근의 자택을 자주 드나들었다. 프랑스 조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한적한 곳이라서 비밀임무를 수행하기 적당했다. 안공근의 집에서 윤봉길, 최흥식, 유상근 등 한인애국단원들이 출정 선서와 기념촬영을 했다. 다만, 이봉창은 선서는 안공근 집에서 했지만 기념사진 촬영은 한인이 운영하던 '백제맨션'이라는 사진관에서 진행됐다. (백범의 길 책 참조)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한인애국단은 단장에 김구, 단원으로 군무장이던 김철과 안공근, 엄항섭, 김홍일, 안경근, 손두환,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등 모두 27명이 해방 후 확인된 인물이다"고 밝혔다. (한인애국단. 임시정부기념관 발행 '독립신문' 글)
한인애국단은 김구의 지도와 임정 군무장 김철의 지원으로 1932년 들어 거의 매월 거사를 도모한다. 1월에는 이봉창의 동경 천황 폭탄 투척, 3월 유진식, 이덕주 조선총독 암살, 4월 윤봉길 상해 홍커우 공원 일본 전승식 투탄, 5월 최흥식, 유상근 관동군사령관 암살 기도 등이 잇따랐다.

#윤봉길 의거 후 임정 요인 도피
김구와 김철, 엄항섭, 안공근 등 4명은 상하이 피치 목사 집에 숨어들었다. 외국인 목사 자택에 은거하다 보니 일제의 검문검색을 피할 수 있었다. 20여 일을 버텼다. 김구는 결단했다. 더 이상 의거와 무관한 임정요인들이 붙잡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5월8일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자신임을 밝혔다. 중국신문 신보(申報)를 통해 이를 알렸다.
김구는 피치 목사의 부인 제랄딘 여사와 부부로 위장, 피치가 운전한 차량을 타고 상하이를 빠져나갔다. 중국 저장성 자싱에 있는 추푸청이라는 국민당 계열 인사가 마련한 은신처로 향했다. 자싱 메이완가 76번지였다. 그사이 백범 김구에게는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일본 외무성 20만원, 조선총독부 20만원, 상하이 주둔 일본군 사령부 20만원. 그때 중국 노동자 월급이 30원이었으니 거액의 현상금이었다. 현시세로 환산하면 200억 원에 달한다.

#김철 숙소에 임정 사무실 열어
김철은 항저우 청태제2여사 32호실에 입주했다. 일종의 숙박시설이면서 동시에 오피스텔 같은 건물이었다. 임시정부를 다룬 베스트셀러 '임정로드 4000㎞'를 보면 '김구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이 자싱에서 피난생활을 이어갈 때 임시정부도 항저우에 터를 잡아 꿋꿋하게 정부로서 모습과 기능을 유지했다. 특히 김철 선생의 공이 크다'고 김철을 높게 평가했다.
김철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 일왕 저격사건, 4월29일 윤봉길 의거 당시에 대한민국 임정부 군무장을 역임하며 김구 선생과 같이 모든 비밀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이후 임정이 일제의 피체 위기에 놓이자 항저우에 청사를 마련, 임정의 연속성을 확보했던 것이다. 김철 선생은 상하이 임정 시대에 이어 항저우 임정 시대를 개척한 주역이었다.
그는 자신의 숙소였던 32호실에 '임시정부 판공처'를 설치했다. 그러다 보니 임정 항저우 청사기념관 입구에는 김구 선생이 아닌 김철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1932년 5월, 항저우에 당도한 임정 간부들은 김철의 거처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재무장에 김철, 군무장에 김구를 임명한다. 김철과 김구의 역할을 맞바꾼 것이다. 김철은 1934년 1월 양기탁 내각 하에서 무임소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에는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된다. 지금으로 보면 대통령실 비서실장에 해당한다.
임정 항저우 시기 여러가지 잡음도 일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지원금에 얽힌 다툼과 불신이었다. 김철도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임정의 단일대오도 김구, 조소앙 등 여러 계파로 나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일강 김철,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가 태어난 구봉산 기슭에 사당 구봉사와 숭모비, 동상을 건립했다. 2003년 6월,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을 열어 그를 기억하고자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본뜬 독립역사관도 함께 개관했다.
함평 임정 청사 뒤편에 그의 묘지가 있다. 그가 묻혔던 중국의 땅 한줌을 가져와 두 부인과 합장했다. 묘지 왼편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김철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부인 김씨는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이 소나무를 일러 '단심송'이라 한다. 일강 김철의 독립 혼인양 사시사철 푸르다.
일강을 뵙고 나오는데 발걸음이 무겁다. 올 때 마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았다.
함평군, 전남도, 국가보훈부가 나서 함평, 전남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역사답사와 상하이-항저우 김철 독립루트 탐방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전남 함평군 신광면 일강로 8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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