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덮친 어둠 뚫고 노인 넷 구한 15세 소년… 웃음은 더디게 돌아왔다
<2> 내 삶을 빼앗겼다 : 중학생 임지호
화마에 집 잃은 '바다마을' 삼남매 동심도 불타
강풍이나 붉은·검은색에 불안… 힘든 학교생활
딛고 일어나려는 아이들 "커서 소방관 될래요"

경북 영덕군 영해면의 영해중학교. 2학년생 엄태민(15)이 한산한 학교 복도에 들어섰다. 한 학년에 반은 딱 2개, 동급생은 50명 정도. 태민은 작은 학교에서 등교가 가장 빠른 축에 속했다. 평소처럼 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교실로 가는데 옆 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창문 안쪽으로 흘끗 들여다본 태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지호야!”
닷새 동안 소식이 끊겼던 임지호였다. 태민은 친구 이름을 소리 내 부르며 교실로 허겁지겁 뛰어들어갔다. 교실 안에 들어서자 매캐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채팅방에서 사라진 소년
3월 25일 밤 태민은 영해면에 있는 집에 누워 쉴 새 없이 메시지가 올라오는 단체채팅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녁부터 울린 경보 때문에 다들 휴대폰만 붙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딱 한 명, 임지호만 채팅방에 몇 시간째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지호 괜찮겠지?’
‘몰라, 전화 4통짼데 안 받아.’
이날 영해면에 산불 대피령이 떨어진 건 오후 7시 20분쯤이었다. 태민도 가족들과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는데, 바람 방향이 바뀌며 불이 경정리로 향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정리에 사는 동급생은 학교에서 지호뿐이었다. 태민과 지호는 엄마끼리도 친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태민은 지호에게, 태민의 엄마는 지호 엄마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진)’
‘얘들아 경정3리에 마을 반이 타버렸대.’
마을을 멀리서 당겨 찍은 듯한 사진이 채팅방에 올라왔다. 주황색으로 물든 밤하늘을 본 태민의 손가락이 굳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인지 채팅방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잠시 뒤 침묵을 깬 질문이 하나 올라왔다.
‘지호 경정 몇 리임?’
아이들이 각자 기억을 더듬어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답했다.
‘3…’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다시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졌다. 그러나 태민은 더 이상 채팅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주 놀러가던 경정 바닷가에서 지호와 공을 차던 기억, 항상 반겨주던 지호네 할머니와 부모님 얼굴이 스쳤다. 그날 밤 태민은 휴대폰을 붙잡고 지호에게 10번 넘게 전화했다. 통화음은 1초 정도 이어지다 끊어지길 반복했다. 타버린 송신탑 때문이란 건 나중에 부모님에게 들었다.
다음 날 혹시 지호가 와 있지 않을까 한달음에 뛰어간 학교엔 비슷한 기대를 품은 다른 아이들만 있었다. 한숨도 못 잤는지 다들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하교 후에도 늘 휴대폰 메신저로 매 순간을 공유하는 아이들에겐 친구가 갑작스레 소식이 끊긴 상황이 매우 낯설었다. 그때였다.
“나 아침에 지호랑 전화했어.”
어젯밤 ‘지호 몇 리 사느냐’고 물었던 박선환이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괜찮대?” “어디래?” 질문이 쏟아졌다. 선환은 지호와 나눈 짧은 대화를 그대로 전해줬다.
“’집 탔어?’ 했더니 ‘집 탔어, 옷도 없어, 다 탔어’라더니 ‘지금 상황 때문에 전화가 안 된다’… 그렇게 1분도 안 돼서 끊어졌어.”
“지호 목소리가 엄청 잠겨 있다”고 덧붙이는 선환의 얼굴이 어두웠다. “어디 아프단 말은 따로 없었어?” “지금은 어디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선환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지호 많이 다쳤나 봐” “어떡하냐” 교실 곳곳에 수근거림이 번졌다.
“산 것만 해도 어디야.”
툭 던진 태민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아이들 표정이 다시 풀렸다.

지호가 학교에 돌아온 건 화마가 덮친 지 엿새 만인 3월 31일 월요일이었다. 보풀이 일어난 감색 체육복 상의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등교하던 아이들이 지호를 발견하고 우르르 달려왔다.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넨 것도 잠시, 아이들은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재민이 돼 돌아온 친구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너... 교복은...?”
선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작 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아, 다 타고 이거 하나 남았다.”
옷에서 탄내가 훅 끼쳐와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나온 놀란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다들 머뭇댔다.
“나 괜찮아, 살아 왔잖아.”
아이들 마음을 알았는지 지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배운 대로 했다
3월 25일 오후 8시쯤 영덕의 작은 바다마을인 경정 3리. 지호는 저녁을 먹고 2층 거실에 모로 누워 있었다. 지호 부모는 1층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2층은 가정집으로 쓰고 있었다. TV를 보던 지호는 간지러운 듯 자꾸만 눈을 비볐다. 두 살 어린 동생 재민의 목에서도 연신 가래가 끓었다. 이상한 느낌이 든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어 방문을 열었다. 다섯 살 막내딸 소민을 재우려던 엄마 박현자(47)도 인기척을 듣고 아들 둘을 따라 나왔다. 마당에 나온 세 모자는 순간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뒷산에서 부연 연기가 몰려 오고 있었다. 그 뒤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능선이 보였다. 불길은 바다 방향으로 부는 거센 바람을 따라 빽빽한 소나무 숲을 타고 마을 쪽으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바람은 초등학교 6학년인 재민의 몸이 휘청일 정도로 강했다. 이어 갑자기 온 동네에 불이 꺼져 한밤중처럼 캄캄해졌다. 정전이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이야!”
예고 없이 들이닥친 산불에 현자도 아이들도 어쩔 줄 몰랐다. 그때 따라 나온 남편 임청길(55)이 수십 미터 길이의 고무 호스를 집어 들었다.
“내가 일단 가게랑 마을에 불붙는 거는 막아 볼 테니까, 어머니랑 애들부터 데리고 빨리 도망가!”
청길은 아내와 아이들이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갔다. 현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호에게 당부했다.
“엄마가 차에 시동 켜고 할머니랑 소민이 데려다 놓을 거야. 중요한 것만 챙겨서 차로 와.”
중요한 것. 지호는 친구들과 텔레토비 옷을 맞춰 입고 찍은 초등학교 졸업앨범과 지난겨울 딱 3번 입은 점퍼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때 어촌계장 아저씨와 외국인 선원 형들이 지호 앞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등에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이 업혀 있었다. 지호는 할머니 생각을 했다. ‘우리 할머니도 늘 다리 아프다며 빨리 걷지를 못하는데…’ 뒤이어 마을 주민 대부분이 여든을 훌쩍 넘은 노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지호는 학교에서 배운 화재 안전수칙을 곱씹기 시작했다. “불이야”라고 외쳐 화재 발생 사실을 알리기, 젖은 수건이나 옷으로 입과 코를 가리기, 손전등을 활용해 대피 경로 확보하기… 주변을 둘러보니 어른들은 대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호는 뭔가 결심한 듯 전기가 나가 컴컴한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시각 마을 맨 꼭대기 집에 사는 류재환(88)은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장애가 있어 다리에 힘을 줄 수 없는 재환을 아내 윤랑자(85)가 겨우 집 밖으로 끌어냈다. 바람은 거센데 연기가 가득 차 어딘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집 밖은 가파른 경사로라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랑자는 힘을 준 채 한 손으론 벽을 짚고, 다른 손으론 남편 팔을 잡아끌었다.
‘이러다 둘 다 타 죽겠다’ 재환은 아내를 팍 뿌리쳤다. “사지 멀쩡한 사람부터 먼저 내려가” 그러곤 아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랑자가 울먹이며 재환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부부가 서로를 보지 못할 정도로 사방이 연기로 뒤덮였다. 재환은 내리막길을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양 무릎과 손바닥은 깨지고 찢겼다. 그때 별안간 환한 불빛이 쏟아져 재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할배!”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뜨니 아내 옆에 조명이 켜진 휴대폰을 든 소년이 보였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애를 키우는 집’의 둘째 아들래미, 지호였다.
“지호야, 니…”
재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호가 랑자와 함께 재환을 부축해 일으켰다. 지호는 한 팔로 재환을 붙잡고 다른 손엔 조명을 켠 휴대폰을 든 채 경사로를 비췄다. 셋은 그렇게 조심조심 마을 부둣가까지 내려왔다.
“지호야!”
재환이 내려왔을 때 지호는 마을로 다시 뛰어올라 가고 없었다.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목소리로 있는 힘껏 “불이야!”라고 외쳐 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지호가 이날 골목을 오르내리며 데리고 나온 노인만 재환과 랑자를 포함해 넷이었다.
결국 열다섯 아이였다

현자는 둘째 지호만 생각하면 바다가 떠오른다. 횟집 아이답게 일곱 살부터 아빠, 큰형을 따라 낚시를 나갔다. 지호 낚시대는 릴이 달린 현대식이 아니라 대나무에 실을 꿰어 만든 옛날식이었다. 지호는 장난감 같은 장비로도 물고기를 잘만 낚아 올렸다. 그렇게 잡은 고기는 떠돌이 고양이 ‘믹스’ 몫이었다.
또래들이 하나둘 외지로 떠나고, 큰형마저 대학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며 마을에 어린 아이들이라곤 지호와 재민, 소민 삼남매만 남았다. 그래도 지호는 경정이 좋았다. 바다가 있어서였다. 지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낚싯대와 물안경을 들고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믹스도 슬금슬금 뒤를 쫓았다.
그런 지호가 바다와 반대 방향, 불이 다가오는 쪽으로 뛰고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집 사이에서 동생과 함께 조명을 켠 휴대폰을 머리 위로 흔들며 “불이야!”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시동을 건 차에 시어머니와 소민을 데려다 놓은 현자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현자가 경적을 크게 울리자 두 아들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차에 올라탄 지호, 재민에게 현자는 ‘애들은 그런 위험한 짓 하는 거 아니다’고 다그치려다 멈칫했다. 지호의 눈빛이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장난꾸러기 둘째가 고작 몇 분 만에 훌쩍 큰 것 같았다. 현자는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아빠! 왜 아빠 안 데려가!”
차가 움직이자 재민과 소민이 소리를 지르며 창문에 달라붙었다. 지호네 차는 멀리 가지 못했다. 해안도로를 끼고 3분 남짓 달린 게 전부였다. 이미 마을 사방이 불바다였다. 현자는 탈출을 포기했다. 도로에서 빠져나와 최대한 바다와 가까운 방파제 끄트머리에 차를 바짝 댔다. 여든을 넘긴 시어머니와 현자, 삼남매는 숨을 죽인 채 마을을 뒤덮는 불을 지켜봤다. 바람이 더 거세질 때마다 심장이 조여 들었다. 아이들에겐 여차하면 바다로 뛰어들자고 일러 뒀다.
“켁, 켁…”
갑자기 소민이 기침을 했다. 연기를 마셨느냐고, 목이 아프냐고 물어도 답을 못 했다. 그때 차 문을 벌컥 연 지호가 바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부두 끝까지 간 지호는 웃옷을 벗었다. 그러곤 바닷물에 담가 적신 뒤 물기를 짜내고 차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호는 축축한 옷으로 묵묵히 소민의 작은 입을 가려줬다.
“불 그만 보고 자. 연기 안 마시게 잘 가리고.”
막내 등을 토닥이던 지호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뒷좌석 트렁크 빈 공간으로 기어들어가 구겨지듯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크게 숨을 몰아 쉬고 뱉는 소리가 이어졌다. 백미러로 아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현자는 눈물을 참았다. 지호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봤자 열다섯 살 아이다. 버텨보려 용을 쓴 거였다.

지호네는 불이 잦아든 새벽 6시쯤에나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폭삭 그을려 주저앉은 가게, 도려내기라도 한 듯 뼈대가 드러난 2층 건물 앞에서 수염이 꺼칠하게 올라온 청길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청길은 방파제로 대피했다가 조금 전 돌아온 길이었다. “아빠!” 부르는 외침에 청길은 황급히 꽁초를 밟아 껐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삼남매가 아빠 품에 안겼다.
학교 유일 이재민 아이
집이 타버리는 바람에 경정 3리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 영해중 바로 옆에 있는 빌라가 지호네 식구의 임시 보금자리가 됐다. 원래 창고로 쓰던 곳이라 비좁긴 해도 당장 머물 공간이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지호는 ‘영해중 유일의 이재민’이 됐다. 어느 날 수업 직전 선생님이 갑자기 지호를 부르더니 손에 봉투 하나를 쥐여줬다.
“다들 알겠지만, 지호네 집이 다 불타버렸다.”
알고 보니 경북도교육청에서 나온 이재민 지원금이었다. 한참 예민할 나이인 사춘기 학생들이 있는 교실은 순간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흘긋흘긋 지호 눈치를 봤다. 귀 끝이 벌개진 지호는 수업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불은 삼남매의 일상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불이 나고 꼭 한 달째 되던 4월 24일.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데 지호가 자신 쪽으로 오는 공을 외면한 채 갑자기 멈춰 섰다.
“야, 뭔 일이야!”
패스를 기다리던 선환도, 멀리서 지켜보던 태민도 뛰어왔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지호를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둘러쌌다.
“바람…”
지호가 작게 속삭댔다. 그날은 유독 바람이 셌다. 한 달 전 청송에서 경정리까지 불이 그렇게 빨리 번진 것도 초속 25.4m로 세차게 불던 바람 때문이었다.
“또 불 나면 어떡해.”
잔뜩 움츠러든 지호 모습에 아이들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태민은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지호 어깨를 툭 쳤다.
“야야 안 온다~.”
“그래 괘안타, 내가 옷이랑 축구화 또 빌려주면 되는데 뭔 걱정이야.”
선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따라 붙었다. 시선을 주고받은 다른 아이들도 바람을 등지고 옹기종기 지호를 감쌌다.

지호의 동생들은 색깔 공포증이 생겼다. 재민은 지금도 ‘빨간색’만 보면 심장이 뛴다. 영덕 곳곳에 설치된 풍력발전기엔 일몰 후 충돌방지등이 들어오는데 하필 붉은 색이라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그을린 집을 본 이후로 막내 소민은 검은색을 겁낸다. 타이어 자국이나 검은 페인트 자국을 보고도 “또 여기까지 불이 온 것 아니냐”고 불안해했다. 어린이집 놀이시간에 그림을 그리는데 소민이 마치 불을 표현하듯 빨간색과 노란색 크레파스를 덧칠해 교사가 걱정하며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아이들 모두 이재민을 대상으로 진행된 심리치료를 한 번씩 받았다. 당시는 큰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삼남매를 보는 현자 마음은 편치 않다.
구순을 앞둔 재환은 경정 3리 바닷가를 멍하니 바라봤다. 요즘 따라 파도소리가 더 쓸쓸하다. 바다에 나가면 늘 들을 수 있었던 깔깔대는 지호 웃음소리가 사라진 탓일까. 재환은 지호에게 “살려줘 고맙다”는 말도 못 전한 게 마음에 걸렸다.
지호가 아꼈던 믹스도 집 주변을 맴돈다. 지호 말곤 곁을 잘 주지 않는 고양이가 가게를 수리하러 온 현자에게 쭈뼛대며 다가왔다. 꼬리 끝이 불에 그을려 있었다. 밥을 줘도 잘 안 먹고, 곁만 빙글빙글 돌았다. “믹스야… 지호 당분간 안 온다…” 현자가 쓰다듬으려 손을 뻗자 믹스는 숨어버렸다.
아이들은 자란다

5월 7일 영해의 빌라 앞에서 다시 만난 지호는 훨씬 밝은 모습이었다. 얼마 전 정신없이 치른 중간고사에서 의외로 과학 점수가 잘나와 신기했다는 얘기부터 전날 새 교복을 맞췄는데 키가 클 수도 있으니 사이즈를 넉넉히 맞췄다는 말을 수다스럽게 늘어놨다. 그러곤 주변 나무를 가리키며 웃었다.
“여긴 전부 활엽수예요.”
불이 그처럼 빨리 번진 이유가 궁금해 검색해보다 ‘침엽수는 불에 잘 타는 송진이 나와 활엽수보다 1.4배 많은 열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불이 난 집 주변엔 침엽수인 소나무 숲이 빼곡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지호는 그 길로 빌라 근처를 쏘다니며 나무 잎이 넓은 활엽수가 많다는 걸 직접 확인한 뒤 안심했다고 한다. 바다를 사랑했던 소년은 요즘 숲과 식물을 공부한다. 나무를 태우며 다가오던 불에 대한 공포도 옅어졌다.
동생 재민은 장래 희망이 소방관으로 바뀌었다. “불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무서워만 했던 경험이 싫었어요. 불을 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내 수줍어하던 재민의 목소리가 이때만큼은 또렷해졌다.
“언젠가는 돌아가야죠, 경정에. 얼마 안 걸릴 거예요.”
화마가 앗아간 웃음이 아이들의 얼굴에 돌아왔다. 벌써 한 뼘씩 자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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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옥불에 빠지다 : 김미경 스토리
- • "눈 마주쳤는데 못 구해"… 가슴 속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0211020004261)
- • "눈 마주쳤는데 못 구해"… 가슴 속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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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내 삶을 빼앗겼다 : 서복래 할머니, 중학생 임지호
- • 전쟁도 견뎌냈는데… 화마가 앗아간 72년 삶터, 마음까지 타버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0211030002837) - • 마을 덮친 어둠 뚫고 노인 넷 구한 15세 소년… 웃음은 더디게 돌아왔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0211040001823)
- • 전쟁도 견뎌냈는데… 화마가 앗아간 72년 삶터, 마음까지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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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마을도 사라진다 : 사망자 이분순, 김연대 시인
- • 흙벽 아래 잠든 '101세 수호신'… "못 지켜 미안해요" 이웃도 울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0211050004981) - • 돌아온 이들 반기던 깊은 산골… 화마로 고향의 꿈이 흩어졌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0211040005944)
- • 흙벽 아래 잠든 '101세 수호신'… "못 지켜 미안해요" 이웃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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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그래도 살아간다 : 김현일 이장, 귀농인 강석구
- • 잿더미 속 다시 일어서는 '신흥리 사람들'… 마스코트 똘이도 돌아왔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0211060003829) - • 산불이 '귀농 6년' 삼켰지만… 그의 꽃길엔 새 꿈이 자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0211060001280)
- • 잿더미 속 다시 일어서는 '신흥리 사람들'… 마스코트 똘이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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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이웃 챙기고 구한 작은 영웅들
- • 그날 그곳엔 작은 영웅들이 있었다 [뉴스룸에서]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1716000001194) - • "진정한 영웅"… 화마 뚫고 노인 넷 구한 중학생에 전달된 온정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80601180005349)
- • 그날 그곳엔 작은 영웅들이 있었다 [뉴스룸에서]
영덕=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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