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위 붉은 선혈, 하늘 회전하는 별… 무대가 살아 움직인다

이태훈 기자 2025. 7. 15. 00:4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동명 영화엔 없는 공연의 매력
연극 '렛미인'의 무대 위엔 눈 쌓인 북유럽의 자작나무숲이 펼쳐진다. /신시컴퍼니

순백의 스웨덴 자작나무숲, 흰 눈 위로 붉은 선혈이 번진다. 미스터리에 싸인 재력가가 여는 뉴욕 저택의 화려한 재즈 파티는 비극적 결말의 예고편과 같다. 운명적 사랑을 만난 연인이 함께 춤출 땐, 영원 같았던 둘의 시간처럼 밤하늘의 별들이 길게 꼬리를 끌며 회전한다. 3일 개막한 연극 ‘렛미인’, 내달 1일 개막하는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지난 주말 막을 내린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먼저 사랑받았고, 그 영화와는 별개로 원작 소설에 바탕해 공연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점. 하지만 영화를 봤으니 다 안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라이브 무대에는 영화에선 느낄 수 없는 매혹이 가득하다.

◇‘렛미인’의 북유럽 자작나무 숲

연극 ‘렛미인’의 자작나무 숲속, 뱀파이어 일라이가 폭주해 희생자가 생길 때마다 흰 눈 위로 붉은 선혈이 번진다. /신시컴퍼니

‘렛미인’이 공연 중인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엔 쌓인 흰 눈 위로 늘씬한 자작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진다. 뒤틀린 가정, 동급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는 소년 ‘오스카’(안승균·천우진)는 놀이터에서 ‘일라이’(권슬아·백승연)를 만난다. 소년도 소녀도 아닌, 가냘프고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야수와 같은 뱀파이어 일라이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된 자들이 평생 곁을 지키며 다른 인간들을 죽여 피를 바쳐온 존재다. 무대 위에 구현된 자작나무숲은 오스카의 지독한 외로움이 일라이의 심연과 같은 고독에 빨려드는 공간이다. 그 눈밭 위에서 아이들이 아이를 괴롭히고, 인간이 인간을 공격하고, 어리고 새하얗고 아름다운 뱀파이어 일라이가 폭주한다.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튀어 번지고 희생자도 함께 늘어간다.

만듦새가 대단히 정교한 연극. 장면 전환과 배우들의 동선이 시계 태엽 장치처럼 정교하게 아귀를 맞춰 돌아간다. 뮤지컬 ‘원스’를 연출한 존 티파니와 안무가 스티븐 호게트 콤비는 특유의 세련되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언어 너머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 단검을 든 소년들이 합을 맞춰 움직일 때는 억눌린 폭력성이, 사람들이 자작나무를 쓰다듬으며 춤출 때는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이 객석으로 전염되듯 저릿저릿 퍼져온다. 관객은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이 춥고 스산한 세계에 빠져든다.

‘나를 들여보내줘’라는 뜻의 제목 ‘렛미인(Let Me In)’은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않으면 타인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유럽의 민간 전승에서 나온 말이다. 뱀파이어 일라이가 오스카에게 집에 들어가게 해 줄 것을 청하고, 오스카가 일라이에게 ‘들어오라’고 말하는 순간 둘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구원한다.

영화에서도 충격적인 마지막 수영장 학살 장면은 연극 무대에서 라이브로 볼 때 더욱 충격적이다. 이야기의 재미, 정서적 깊이, 극적 속도감, 스타일의 완성도까지. 모든 걸 다 갖춘 이런 연극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다. 내달 16일까지, 3만3000~9만9000원.

◇‘위대한 개츠비’의 재즈 파티

무대 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속 파티는 비극적 결말의 예고편 같다./오디컴퍼니

내달 1일 서울 GS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개츠비’를 연기한 영화(2013)와 마찬가지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원작 이야기를 따라간다. 한국 오디컴퍼니의 신춘수 대표가 단독 리드 프로듀서로서 제작해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개막한 바로 그 뮤지컬. 토니상 뮤지컬 남자 주연상을 받은 배우 매트 도일이 주인공 개츠비 역을 맡는 등 브로드웨이 배우와 창작진 그대로의 ‘서울 오리지널 프로덕션’이다.

수수께끼의 백만장자가 돼 돌아온 ‘개츠비’는 1차 대전에 참전하며 헤어졌던 연인 ‘데이지’를 되찾으려 애쓰다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뮤지컬의 화려함은 영화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특히 뉴욕 저택 파티 장면은 무대 위에서 구현할 수 있는 화려함의 극치이자, 신나는 춤과 음악의 ‘끝판왕’이다. 이 파티의 화려함은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적 간극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신기루 같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멸을 감싸는 서글픈 사치이기도 하다.

뮤지컬은 지난해 4월 개막한 뉴욕에선 지난달 말까지 7873만 달러(약 1076억 원)의 티켓 매출을 올렸고 지난해 토니상 의상상도 받았다. 올해 4월 개막한 런던 공연은 지난달 셋째 주까지 1130만 파운드(약 211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흥행 순항 중이다. 11월 9일까지, 9만~19만원.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밤하늘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조정은 차지연)와 로버트(박은태 최재림)가 함께 춤 추는 동안, 밤하늘의 별들은 순간이 영원인 듯 길게 꼬리를 끌며 회전한다. /쇼노트

어떤 작품은 세월이 흘러 나이 들며 다시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진다. 지난 주말 막을 내린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그렇다. 5000만부가 팔린 원작 소설뿐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리프가 주연한 영화(1995)도 널리 사랑받았다. 떠돌이 사진가 ‘로버트’(박은태·최재림)와 일리노이 시골에 정착한 이탈리아 여자 ‘프란체스카’(조정은·차지연)가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상처가 나면 아물고 굳은살이 박히듯, 세월이 쌓이면서 누구나 마음 어느 한구석이 단단해진다. 이 뮤지컬은 단단하게 굳어 있던 마음 한구석을 허물어, 잊고 있었거나 무감각해져 있었던 어떤 감정, 원초적인 설렘이나 그리움, 깊은 공감에 대한 갈망 같은 걸 일깨우는 힘이 있다.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말한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예요. 몇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다시는 오지 않아요.”

토니상 음악상과 편곡상을 받은 모든 노래와 음악이 아름답지만, 뮤지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는 두 사람이 함께 춤출 때 무대 뒤편 밤하늘의 별들이 카메라 장노출로 찍은 것처럼 길게 꼬리를 끌며 회전하는 1막의 마지막 장면이다. 사는 동안 어떤 추억은 정지 화면 사진처럼, 혹은 슬로 모션처럼 기억된다. 움직이는 별들은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춤추는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영원에 가까웠는지 표현하는 듯하다. 라이브 무대가 가진 정서적 힘이다.

프란체스카가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 로버트를 그냥 떠나 보낸 뒤, 소설을 기준으로 두 사람은 그 뒤로도 22년간 그저 서로를 그리워하며 산다. 무대 위에서 그 시간은 또 화살처럼 흘러간다. 프란체스카 인생의 굴곡을 짚어가는 장면 전환이 어떤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다. 역시 라이브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