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그은 선, 쉽게 넘나드는 보복범죄 [가정폭력 살인, 반복된 ‘시그널’·(下)]
‘임시조치·피해자보호명령’ 통합운영 검토 목소리
가해자 재범 방지 위한 GPS전자추적장치 도입도
미국·영국 법원은 영구적인 접근금지 명령도 가능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형사처벌 유무와 관계없이 접근금지 등을 명령할 수 있는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동탄 납치 살인’, ‘대구 스토킹 살인’, ‘부평 가정폭력 살인’ 사건의 가해자들에게도 이 조치가 이뤄졌지만 끝내 이들의 보복 범죄를 막을 순 없었다.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제도가 유명무실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수백 건 판결문 분석해 보니… 접근금지 명령받아도 재범, 앙심품고 살해까지
경인일보가 접근·연락금지 등 법원의 ‘임시조치’ 명령을 위반해 지난해 기소된 사건 수백 건의 판결문을 취합해 분석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가정폭력 가해자가 임시조치를 위반하고 피해자에게 접근하거나, 연락한 뒤 폭행, 협박, 살인 등 2차 가해를 저지른 사건은 지난해에만 540여건에 달했다.
경기 화성에서는 아내를 폭행해 임시조치(접근금지 등)를 명령받자 앙심을 품고 자택에 침입해 불을 질러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인천에선 이혼한 전처를 폭행·강간해 임시조치를 받자 보복하려고 전처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도 있었다. ‘동탄 납치 살인’, ‘대구 스토킹 살인’ 가해자들도 각각 긴급임시조치, 임시조치를 명령받은 상태였으나 이를 어기고 살인을 저질렀다.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라 임시조치를 위반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피해자보호명령을 위반한 경우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이 선고될 수 있다. 하지만 가해자가 법원의 명령을 어기고 피해자를 위협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피해자가 일일이 신청·연장 안 하면… 곧장 생기는 ‘보호 공백’
가해자에 대한 임시조치나 피해자보호명령을 피해자가 제때 신청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임시조치(1회 2개월)와 피해자보호명령(1회 1년)은 가정폭력처벌법에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2개월마다 피해자가 연장을 요청해야 한다. 피해자가 미리 요청하지 않으면, 관련 조치는 종료된다. 그마저도 임시조치는 최대 6개월, 피해자보호명령은 최대 3년까지만 적용된다.
경찰이 피해자를 대신해 법원에 신청할 수 있는 임시조치와 달리 피해자보호명령은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청구해야 한다. 수사기관의 도움 없이 피해자가 상해진단서와 의견서 등 소명자료를 준비하고, 법원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불러 조사해야 해 명령이 시행되기까지 최소 일주일이 걸린다.
‘부평 가정폭력 살인’ 피해 여성은 지난해 12월 흉기를 들고 자신을 위협한 남편의 임시조치(접근금지 등)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 피해자보호명령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여성이 살해된 지난달 19일은 경찰로부터 피해자보호명령 신청 방법 등을 안내받기로 한 날이었다. (6월27일자 4면 보도)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법제에 관해 연구한 노호래 국립군산대 교수는 “임시조치와 피해자보호명령으로 제도가 나뉘어 있고, 피해자가 이 조치를 원한다고 경찰에 의사를 밝히거나(임시조치), 법원에 직접 신청(피해자보호명령)해야 해 보호 공백이 생기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수사기관이 먼저 나서 피해자 보호 조치를 명령해달라고 법원에 청구하고, 두 제도의 통합 운영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GPS 부착하고 접근금지 기간 없애 2차 가해 막아야”
국회입법조사처는 임시조치나 피해자보호명령을 위반하는 가해자의 재범을 막기 위해 GPS 전자추적 장치 도입을 제안한다. 미국, 영국, 호주는 가정폭력으로 접근금지 조치를 받은 가해자에게 GPS 전자추적 장치를 부착한다. 가해자가 일정 거리 이내로 피해자에게 접근할 경우 경찰이 이를 즉각 인지하고 조치를 취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현행 제도는 가해자의 접근을 확실하게 막을 수 없어 피해자들은 보호 조치를 받는 중에도 불안감에 떨며 살아간다”면서 “가해자에게 GPS 전자추적 장치를 부착시켜 피해자를 2차 가해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국가들에선 법원이 피해자를 계속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피해자에 대한 영구적인 접근금지를 가해자에게 명령할 수도 있다.

‘부평 가정폭력 살인’ 피해자 유족 인터뷰

수사당국은 이런 일 다시 없게 약속해 줬으면…
‘부평 가정폭력 살인’ 유가족들은 수차례 위험 신호들이 있었다고 했다. 지난달 19일 인천 부평구 자택에서 피해자 최모(65)씨가 남편에 의해 살해되기까지 분명한 ‘시그널’이 있었다는 얘기다.
지난해 12월17일 남편 오모(63)씨는 자택에서 흉기를 들고 아내 최씨를 찌르겠다고 협박해 ‘특수협박’ 혐의로 체포됐다. 6개월의 접근금지 명령이 풀린 오씨는 앙심을 품고 일주일 뒤 자택에 찾아가 아내를 살해했다.
유족들은 이 부부가 지난 2017년 경기 군포에 거주했을 때 발생한 가정폭력 사건을 ‘첫 번째 위험 신호’로 꼽았다. 지난해 12월17일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인천삼산경찰서 경찰관에게 최씨는 군포에 살 때도 남편에게 심각한 폭행을 당했었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상습적으로 폭력행위를 저지르거나 흉기를 이용한 가정폭력 사범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구속’ 수사하라는 경찰청 지침에도 인천삼산경찰서는 당시 남편이 ‘과거 가정폭력으로 입건된 기록이 없는 초범’이란 이유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 (6월23일자 6면 보도)
최씨 여동생은 지난 13일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군포에서 벌어진 가정폭력 사건 때 형부의 폭행으로 언니 손이 찢어지고 조카 팔이 부러졌다”며 “둘이 합의해 사건을 정식 접수하지 않았다고 해도 최소한 경찰이 출동한 ‘기록’은 남아 있었을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예전에 가정폭력으로 신고한 적이 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왜 경찰이 형부가 초범이란 이유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최씨 남매들은 오씨가 접근금지 명령 기간 중 자신들의 집 주변을 수차례 배회해 위협을 느꼈다. ‘두 번째 위험 신호’였다. 최씨 남동생은 “매형은 누나와 싸울 때마다 ‘너희 남매들도 같이 찔러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며 “보복심이 강한 사람이라 우리도 해코지할까봐 불안했다”고 말했다.
접근금지 명령이 끝난 남편의 보복을 두려워한 최씨는 살해되기 전 일주일간 신고와 상담 등 최소 3차례 이상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세 번째 위험 신호’였다.

최씨는 살해되기 하루 전인 지난달 18일에도 삼산서 경찰관과 상담 전화를 했다. 7분58초 분량 녹취 파일에서 경찰관은 “남편도 집에 들어갈 권리가 있다”고 최씨를 질책하거나, 금전 지원을 종용했다.
최씨 여동생은 “경찰이 언니에게 했던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그 말을 영장실질심사 받으러 들어가는 형부가 취재진에게 똑같이 말하더라”며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경찰이 대응해줬더라면 언니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을까 싶다”고 토로했다.
최씨는 남편의 폭력이 두려워 이혼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최씨 여동생은 “통화 녹취에서 경찰이 말한 것처럼 형부는 평소 언니에게 ‘이혼하고 싶으면 나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며 “생계를 잇다가 다친 언니는 돈을 줄 형편이 못 됐고, 아들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봐 참고 살았다”고 했다.
최씨 유족은 똑같은 비극이 더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했다. 최씨 여동생은 “죽은 언니가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닌데, 이제와서 경찰의 사과 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다만, 경찰 등 수사당국이 가정폭력 피해자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데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유족의 뜻에 따라 지난달 23일 최씨 유골은 인천 중구 연안부두 앞바다에 뿌려졌다. “생전 언니는 가장 편해야 할 집이 감옥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더는 갇혀 지내지 말고, 물길을 따라 자유롭게 온 세상을 여행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최씨는 사망 후에야 감옥이었던 집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국회, 검·경·피해자 보호시설 종사자 구성 ‘사망검토제’ 도입 논의

‘반의사불벌’ 제외·‘생각 통제 정서적 학대’ 포함
용혜인 의원 “친밀한 관계 폭력 예방 입법 활동”
국회에서 ‘가정폭력 사망검토제’ 도입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른바 ‘친밀한 관계’인 전·현 배우자나 연인 등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들이 잇따르고 있어서다.
지난달 11일 전진숙(민·광주 북구을) 국회의원은 가정폭력으로 피해자가 사망했거나 생명에 중대한 위협을 받은 사건을 분석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자는, 이른바 사망검토제 내용이 담긴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검찰과 경찰 공무원, 피해자 보호시설의 종사자 등으로 구성된 ‘검토위원회’가 각 사례를 분석해 수사 과정이나 피해자 보호 체계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었는지 살피는 게 주된 내용이다.
이후 사례 분석 결과 보고서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해 제도의 허점을 개선하도록 한다.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영국·포르투갈 등 이러한 제도를 이미 시행하고 있는 국가도 많다. 개정안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부쳐져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를 포함한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안 18개가 국회에 발의돼 있다. 법안들에는 가정폭력 범죄에 대한 반의사불벌을 제외하고, 가해자가 상대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명령과 지시에 따르게 하는 등 개인의 행동과 생각을 통제하는 ‘정서적 학대’도 가정폭력에 포함하는 내용이 담겼다. 임시조치와 피해자보호명령을 위반한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거나, 상담을 조건으로 가해자 처벌을 하지 않는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를 폐지하는 법안도 있다.
김효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원은 “현행법에 있는 가정폭력 범죄에 대한 반의사불벌과 수사기관의 안일한 인식 등으로 범행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용혜인(기본소득당·비례) 국회의원은 “‘형사소송법’상 구속 사유에 ‘피해자 위해 우려’를 포함해 피해자가 보복 범죄를 당하기 전에 가해·피해자 분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동탄과 대구, 부평 등에서 잇따라 발생한 가정폭력 살인 사건을 계기로 반의사불벌죄 등 가정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을 사실상 가로막는 현행법을 개선하는 등 ‘친밀한 관계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입법 활동에 나서겠다”고 했다.

/정선아·송윤지 기자 s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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