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지 ‘한글’에 담긴 항일의 기억 [항일의 기억, 광복의 기쁨·(8)]

강기정 2025. 7. 1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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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갸날’서 잡지까지… 언어에 아로새긴 ‘민족 DNA’

주시경 제자들, 1921년 조선어연구회 조직
1926년 오늘날 한글날 시초격 ‘가갸날’ 제정
1927년 국어 연구 최초 전문지 ‘한글’ 창간

의왕향토사료관, 창간호 포함 3개 호 소장중
권덕규·이희승 등은 맞춤법·표준어 정리 작업
언어 독립 운동, 일제 조선어학회 사건 연결

「‘한글’이 나았다. 훈민정음의 아들로 나았으며 이천 삼백만 민중의 동무로 나았다. 무엇 하러 나았느냐. (중략) 조선이란 큰 집의 터전을 닦으며 주초를 놓기 위하야 병인 이듬해 정묘년 벽두에 나았다. (중략) 갓난아이인 ‘한글’은 힘이 적으나 그 할 일인즉 크도다.」(1927년 동인지 ‘한글’ 창간사)

1905년 을사조약,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서서히 언어를 비롯한 조선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기 시작했다. 모든 교과서를 일본어로 만들게 하며 어린 학생들에게서부터 ‘우리 말’을 앗아간 게 단적인 모습이다. 국어학자 주시경은 이런 상황에 반발해 청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어 우리 말 연구에 힘썼다. 1914년 주시경 사후, 권덕규·신명균·이병기·정열모·최현배 등 그의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었다.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는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에 대항하고, 우리 말을 연구함으로써 고유의 얼을 지키고자 한 스승의 발자취를 잇고자 함이었다.

실제로 조선어연구회는 우리 말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으로 항일의 불꽃을 태웠다. 대표적인 일이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오늘날 한글날의 시초인 ‘가갸날’을 제정한 것이다. 또 1927년 2월 동인지(잡지) ‘한글’을 만들었다. 당시 뜻을 함께 하는 청년들은 ‘동인(同人)’을 결성해, 결과물을 동인지 형태로 발간하곤 했는데 ‘한글’은 국어 연구 내용을 다룬 최초의 전문지였다.

■ 동인지 ‘한글’

의왕향토사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국어 연구 전문지 ‘한글’의 창간호와 2~3호. /의왕시 제공


1927년 2월 창간한 동인지 ‘한글’은 이듬해인 1928년 10월까지 모두 9차례 간행됐다. 4판, 혹은 6판 정도로 제작됐다. 2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짧게 이어졌지만 국어 어문 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의미가 크다. 이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개편한 후, 1932년 5월 정식 기관지인 ‘한글’을 만들었다. 동인지 ‘한글’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뜻이 계속 해서 이어졌던 것이다. 당시 기관지 ‘한글’ 창간사엔 「사 년 전에 몇 분의 뜻 같은 이들끼리 ‘한글’ 잡지를 내기 비롯하여 일년 남아나 하여 오다가, 온갖 것이 다 침체되는 우리의 일인지라. 이것마저 이어갈 힘이 모자라서 지금까지 쉬게 된 것은 크게 유감되는 바이다.」라며 동인지 ‘한글’을 이어가지 못한 데 대한 이유와 아쉬움이 담기기도 했다.

우리 말을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큰 의미를 남긴 동인지 ‘한글’의 흔적은 의왕향토사료관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2007년 문을 연 의왕향토사료관은 5천점 이상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동인지 ‘한글’ 3개 호가 포함돼 있다. 각각 1927년 2월과 3월, 4월에 발행된 것으로 2월 발행 잡지는 창간호다. 지난 2023년 사료관 측이 경기도문화재위원회에 문화재 등록을 신청했고, 이듬해인 2024년 4월 경기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의왕향토사료관에 따르면 ‘한글’ 창간호에는 왜 동인지 ‘한글’을 만들게 됐는지 등에 대한 창간 기념사가 담겨있다.

한글 해례본의 복사본이나 간단한 연구 보고서 등도 3점의 잡지에 포함됐다.

사료관 측은 “지난 2022년 11월 지역 출생의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선생과 한글을 주제로 전시했다. 그때 이희승 선생이 활동했던 조선어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서 동인지 ‘한글’을 제작했다고 해 함께 전시했다. 근현대시기 한글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보여주는 전시를 이희승 선생과 연결해서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전시 전, 관련 유물을 매입하는 방안을 추진했는데 동인지 ‘한글’은 그때 구입하게 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상시 공개되진 않지만 사료관은 이르면 내년께 관련 전시를 연다는 계획이다. 사료관 측은 “내년이나 내후년쯤 ‘한글’에 대해 단독으로 전시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 권덕규와 이희승

권덕규. /국가보훈부 제공


1891년 김포에서 출생한 권덕규는 주시경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학교에서 국어, 국사 등을 가르쳤던 권덕규는 스승의 뜻을 이어 조선어연구회를 만드는데 함께 했고, 동인지 ‘한글’ 제작에도 참여했다.

훈민정음 반포 이전의 우리 말이 어땠는지, 훈민정음 창조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고증 오류는 없는지, 조선 문화의 주축을 이뤘던 불교와 우리 말의 연관성 등을 ‘한글’에 기고하기도 했다.

조선어연구회의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였던 조선어사전 편찬을 발기인, 위원으로서 주도하기도 했다. 또 한글을 단순한 언어가 아닌, 하나의 학문으로서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했다. 이후 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편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해,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경기도 대표 인사로서 표준말을 정리하는 작업 등을 이끌었다.

이희승. /국가보훈부 제공


1896년 의왕에서 태어난 이희승 역시 주시경에 영향을 받아 일생을 국어 연구에 바쳤던 학자다. 학창 시절, 일본어로만 수업하는 점에 항의해 자퇴하기도 했던 그는 주시경의 ‘국어문법’에 큰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30년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권덕규와 더불어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 사정 사업에 참여했다.

권덕규, 이희승을 비롯한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언어를 비롯해 조선의 문화와 얼을 말살하려던 일제에겐 큰 위협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언어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이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강한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에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을 강제로 연행, 재판에 회부했다. 이윤재와 한징 등 일부 인사들은 고문 후유증 등으로 순국했다. 이희승은 이극로, 정인승, 최현배 등과 함께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맞은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권덕규 역시 연행이 시도됐지만 건강상 문제로 불발됐다.

언어에는 민족의 혼이 담겨있다. 그 혼을 지키고자 했던 움직임은 가장 큰 저항이었다. 동인지 ‘한글’, 이를 만들어낸 그 때 그 시절 국어학자들의 행보는 항일의 기억 그 자체다.


/강기정·한규준 기자 kangg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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