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더하기] 여름나기 추억

해마다 여름이면 계곡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머문다. 환청처럼 쉼 없이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는 내가 살아온 유년 시절의 원초적 음향이다. 연속성만 있다면 여름밤 윗마을에서 들려오는 먼, 개 짖는 소리같이 은은하고 정감 있는 원음이다.
소들이 언덕에서 풀을 떴을 무렵 나는 계곡에서 가재를 잡거나 강아지풀로 만든 물레방아를 걸며 놀았다. 여치가 울어대는 풀숲엔 개금과 망개가 익어가고, 반석에 홀로 누워 푸른 하늘에 핀 뭉게구름을 바라보았다. 손소희의 창포 필 무렵과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은 먼 향수를 불러왔다.
도시의 기계음을 모르고 살던 시절, 말복이 지나면 동네 남자들은 모가 푸르게 자란 논 가운데서 논매기 노래를 불렀다. 논두렁에 앉아 있던 황새가 들판을 가로질러 날아가던 풍경도 눈가에 선명하다. 밤에는 가재 잡이도 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도랑에서 헌 고무신을 태워 불을 밝히면, 바위틈 돌 틈에 숨었던 가재들이 슬슬 밖으로 나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냄비에 가재를 넣고 끓이면 빨간 색깔로 변하고 밭에서 대파랑 마늘잎을 뜯어 넣어 일종의 '가재탕'을 끓이기도 했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의 자연 놀이다.

여름방학 책엔 과제가 수두룩했고 밀린 일기도 써야 했지만 모두가 "날씨 맑음, 오늘 꼴 벰, 토끼풀을 줬다" 등 개학을 앞두고 한꺼번에 쓰기 일수다. 여름방학 과제로는 곤충채집이 빠지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파브르 곤충기도 읽으며 여러 가지 곤충을 잡으러 다녔던 이유 말이다.
꼴 베고 지게질하면 땀범벅이 되고, 땀띠가 뻘겋게 부풀어지면 산자락 바위틈에서 내려오는 물을 바가지로 퍼서 등목을 했다. 이 물은 어머니도 동네 아주머니들도 피부를 재생하는 수단으로 여름의 성소가 되었다. 그 밖에도 소나기에 불어난 도랑물을 막아 소를 만들고 물놀이를 하거나, 밀짚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며 여치 집을 만들기도 했다. 여치 집은 하나의 형식이 있는 멋진 공예 작품이기도 했다.
돌담 밑엔 감나무가 있고 그 아래 멍석을 펴면, 훌륭한 여름 휴식처가 되었다. 가끔 풋감이 툭툭 떨어지고 담장엔 호박꽃이 노랗게 핀 푸른 줄기 따라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장독이 모여 앉았다.
여름 풍경을 소재로 오늘은 수강생들과 수채화를 그려보았다. 저마다 멋진 풍경을 도화지 위에 옮겼다. 강변에 서 있는 무성한 나뭇잎, 싱그러운 초록빛 녹음은 여름을 경작하는 아름다운 방법 같았다. 곤충 채를 들고 잠자리를 낚는 모습도 보이고, 옥수수 단 속에서 소나기를 피하는 소년처럼, 시냇가의 버들치처럼, 한때 활발하고 빨랐던 인생 절정기의 일기를 읽는 듯했다. 먼 훗날에 돌아 본.
이해균 화가, 해움미술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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