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57) 여왕과 반란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왕위를 계승할 때와 같이 마지막 왕위를 넘겨줄 당시에도 반란이 일어나 어지러운 상황에서 결국 운명하는 불운한 군주로 남았다. 여왕은 15년여의 왕좌에서도 침략군들을 방어하면서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지혜를 발휘해 정책을 개발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지혜로운 덕만공주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6부 대신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중앙집권적인 왕권 강화와 제도를 정비하고 있었다. 진골출신이었던 칠숙이 나이 든 진평왕의 뜻에 반기를 들었지만 용수와 용춘 형제를 비롯한 친왕세력에 잡혀 구족이 멸문을 당하며 사라졌다.

◆신화전설: 칠숙의 난
진평왕은 재위 50년을 넘기면서 스스로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들이 없어 왕위를 누구에게 이양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도 날이 갈수록 깊어져 갔다. 왕은 덕만공주의 총명함과 뛰어난 판단력에 따른 리더십을 믿고 공주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하고, 부마 용수 형제와 가까운 대신들과 함께 왕위 이양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이찬 칠숙은 아찬 석품과 모의해 공주에게로 넘어가는 왕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만약 왕권이 덕만공주에게로 넘어간다면 폐위된 진지왕의 후손 용수 형제와 가야계 김서현 세력이 정권을 잡고 진골 출신인 자신들은 변방으로 밀려날 것을 염려해 모반을 획책했다.

진평왕은 왕권에 대한 도전에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면서 칠숙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고, 그의 구족까지 샅샅이 찾아 모조리 극형에 처했다. 이어 가족이 보고 싶어 변장하고 집으로 숨어들던 석품도 체포해 목을 베었다.
진평왕은 제도를 정비해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더욱 강화하고, 공주가 편안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용수 형제와 김서현을 중심으로 체제를 이중삼중으로 튼튼하게 했다.

◆흔적: 명활산성
명활산성은 경주 시가지에서 보문단지로 올라가 보문호 허리의 서남쪽산을 에워싸고 있다. 성은 허물어진 곳까지 9.5Km 정도의 둘레로 조성됐다. 산성이 에워싸고 있는 봉우리는 해발 259m의 낮은 산이지만 동해에서 신라로 침범하는 세력을 방어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특히 왜병과 자주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명활성이 자리하고 있는 명활산은 신라를 옹립한 6부촌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한기부 배씨의 시조가 된 금산 가리촌의 지타 촌장이 하늘에서 처음 내려온 곳이 명활산이라 한다. 또 습비부 설씨의 시조가 된 호진은 명활산의 고야촌에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명활산은 신라의 존립에 많은 영향을 미친 땅이다.
삼국사기는 '실성이사금 4년(405년)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쳐부쉈다'는 내용이 명활성에 대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처음 명활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현재 돌로 쌓은 산성의 흔적은 4.5Km 정도이나 토성은 거의 5Km에 흔적이 남아 있다.

◆스토리텔링: 비담의 반란
선덕여왕은 아버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접경지역에 성을 쌓고, 내부적으로도 황룡사구층목탑, 첨성대 등을 건설해 군사적인 전략과 농사정보를 축적하는 정책으로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온 힘을 쏟았다. 또한 용수 형제에 막강한 그들의 후손이자 조카인 김춘추를 오른팔 삼아 정책 입안과 외교문제까지 맡겨 내부 귀족들간의 세력 균형을 맞추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강력한 무력과 지혜를 겸비한 김유신에게 그의 아버지 김서현보다 중책을 맡겨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다.
그러나 여왕은 후손이 없어 후계구도를 구상하는데 고민이 깊었다. 어쩔수 없이 여왕은 사촌동생이자 미모가 뛰어나고 지혜로운 승만공주에게 왕위를 이양하기로 하고, 춘추와 김유신에게 뒤를 살피라고 당부하면서 힘을 실었다.

찬란한 황금빛 왕좌에 앉아 고대 왕국 신라를 이끌던 여왕의 말년, 바로 그때였다. 바람결에 극도로 긴장하게 하는 소식이 궁궐을 뒤흔들었다.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고 군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비담은 신라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로, 태생부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늘 그늘진 마음에서 왕권을 바라보면서 야심을 키워왔다. 비담은 여성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여왕이 나이 들어 노환으로 자주 병석에 드러눕게 되는 사이, 비담은 마음속에서 뜨거운 불길을 키웠다. '내가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그의 야망은 점차 말로 다할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왕궁 앞으로 기마병과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밤하늘을 갈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궁궐 안까지 전해졌다. 반란이었다. 비담과 염종의 불꽃은 신라 왕실을 위협하는 거대한 폭풍으로 번져갔다.
선덕여왕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오랜 시간 정치와 전쟁을 지혜로 이겨낸 여걸이었다. 여왕은 이미 비담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에게 명을 내려 대비책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김춘추를 추종하던 화랑세력과 김유신의 주력부대는 은밀하게 궁궐 주변에 매복하고 있었다.
궁의 담을 넘어서는 비담과 염장의 군사들은 매복해 있던 화랑들과 김유신의 주력부대의 민첩한 움직임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전장에는 숨 막히는 긴장과 전율이 흐르고, 적과 아군이 휘두르는 칼부림은 요란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저항에 비담과 염종은 후퇴해 명활산성으로 물러나야 했다.
명활산성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비담의 세력들은 다시 궁궐을 향해 전진하기 위해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권의 힘과 지혜, 그리고 절대적인 무위를 자랑하는 김유신 장군의 힘은 결국 반란을 잠재웠다. 비담은 야망을 꺾어야 했고, 신라는 다시금 평화를 찾았다. 선덕여왕은 그해 하늘로 돌아갔지만, 그녀가 남긴 용기와 결단은 뒤를 이은 진덕여왕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비담의 불꽃은 꺼졌지만, 그 불꽃이 남긴 흔적은 신라의 역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한때 불꽃처럼 타올랐던 비담의 난은 신라의 왕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고,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진덕여왕은 튼튼한 울타리를 두르고, 당나라와의 교류로 한 단계 더 성장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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