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진실 알리기 위해 투쟁 계속"
억울함 풀겠다는 일념으로 나서
국가폭력에 대항한 항쟁 알려야

5·18 기동타격대 4조로 활동한 김공휴(66)씨가 5·18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 이유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였다. 나 자신과 광주시민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총을 들고 싸운 것밖에 없었는데 체포돼 구타당하고 내란 부화 수행죄까지 뒤집어썼다. 김씨는 출옥 후 곧장 5·18 진실 알리기에 나섰다. 군인들이 왜 아무런 죄 없는 시민들을 학살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정권 찬탈을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경찰이 항상 따라다니면서 감시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대구로 무작정 이사를 갔는데 다 지켜보고 있으니 가만히 죽은 듯이 있으라는 내용의 경고 엽서가 오기도 했다. 하지만 김씨는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우선 5·18 당시 외신기자가 촬영한 사진과 비디오를 어렵게 구해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가 철저하게 고립돼 있어서였다. 광주로 돌아오고 나서는 기동타격대동지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고흥 출신인 김씨는 고흥동초등학교 전교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났다. 당시 고흥동초등학교는 재학생 수가 2천여명으로 고흥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김씨는 기동타격대동지회가 주축이 돼 조직한 5·18 구속자회의 조직국장, 오월항쟁동지회의 인권복지국장 등을 맡으며 5·18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현재도 공법단체 5·18부상자회에서 간부로 활동하며 5·18의 정체성을 지키는 중이다.
김씨는 5·18을 주제로 한 강의도 요청이 들어오는 대로 마다하지 않고 실시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자라나는 새싹들을 상대로 5·18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부터 5·18은 불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항한 기층민들의 항쟁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렸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5·18 당사자들 대부분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해 국가유공자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솔빈기자 psh0904@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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