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살이 마치자마자 진상규명···의식화된 민주화 전사로

이용규 2025. 7. 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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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 후 타격대 동지회 발빠르게 구성
끊임없는 감시·미행에도 굽히지 않은 뜻
5월 관련 첫 단체… 구속자협의회 모태
암매장 발굴·진상 알리기 등 종횡무진
피 서린 도청별관 철거반대 좌절에 실망
광주 서구 치평동 5.18자유공원 내 영창 법정.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기동타격대는 5월 광주의 상징이다.

항쟁 당시도 그렇고 항쟁 이후도 이들의 전천후 활약은 눈부셨다. 항쟁 때에는 도청지도부와 학생지도부가 사회지도층이나 운동권 중심으로 구성된 반면, 이들은 노동자 등 존재감은 없었지만 죽음의 위협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온몸으로 도청에서 일전을 치렀다. 이후에는 5월 전사의 정체성을 지키고 5월 광주의 명예 회복과 진상규명에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앞장섰다.

기동타격대원들은 체포 석방 이후 5월 전사로서 거듭났다. 이들의 항전 참여 동기는 광주공동체를 공수부대 만행에서 지켜내기 위한 분노에서 출발했다. 대부분 학력이 초·중등 중퇴생이었고, 노동자·종업원 등 평범한 이들은 상무대에서 조사받을 때 수사관들이 그들을 향해 "내란, 내란"을 말할 때 라면 한 그릇으로 뜻을 이해했지만, 영창과 교도소에서 투쟁하며 독방·징벌방을 거치며 사회와 역사의식을 새롭게 발견했다. 기동타격대원들은 대장 윤석루와 부대장 이재호씨를 제외하고 1981년 3월까지 모두 석방됐다. 구성회·양기남·도준식 ·김태찬·오정호·염동유 씨 등은 1980년 12월29일 집행 면제를 시작으로 이재춘 씨 등은 13명은 1981년 3월3일 대통령 특사로 출옥했다. 당시 계엄당국은 이날 특사로 석방된 13명에 대대적 홍보를 했다. 체육관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 취임에 맞춰 내란죄를 받은 타격대원들의 형 집행 정지를 정권 홍보수단으로 이용했다. 5·18 내란죄를 받은 이들의 형 집행을 정지해 석방한다는 시혜를 베푸는 정치쇼를 벌인 것이다. 광주교도소 앞에는 기자와 학생들이 대거 진을 치고 있었다. 출소하는 대원들은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며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석방된 대원들은 모두 5·18 묘지를 참배하고 긴 슬픔에 잠겨 흐느꼈다.

석방된 이들은 분명한 역사의식과 나아갈 방향이 뚜렷했다. 본인들의 처절한 노력으로 대학생 이상으로 현실을 냉정히 바라볼 만큼 의식화됐다. 우선적으로 기동타격대 동지회 구성에 발 빠르게 나섰다. 이들은 6조 대원 나일성씨가 구해온 기동타격대 명단을 갖고 회원들을 찾아 나서 한명 한명 모아 정관을 만들고 초대회장에 공군방위병으로 유일한 현역군인이었던 이재춘, 총무에 김현채 등으로 집행부를 구성했다. 5·18 관련자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최초 단체이다. 후에 구속 수감된 5·18 관련자 426 명단을 토대로 1984년 구속자협의회를 출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마지막 항전을 한 기동타격대가 구속자협의회 출범에도 중추적 역할로 전두환 공포정치에도 맞서 5월 항쟁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줬다.

이재춘씨는 "기동타격대는 급조됐지만 항쟁 기간 일반 대중들의 투쟁의지를 조직화할 필요성으로 무질서 속에 일정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군사 조직이고 감옥에서 만난 운동권 대학생들이 조직을 결성해야 힘을 낼 수 있다는 조언으로 타격대 동지회를 결성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들의 향후 활동은 험난한 고통의 시간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출소 당시 '5·18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기억하지 말고 고문을 받았다고 말해선 안 된다' 등 입틀막이 이뤄진 상태라 모든 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심지어 거주지를 떠날 때 반드시 관할파출소에 신고해야 했다. 이를 어기고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면 어김없이 어떻게 알았는지 당국의 협박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마음을 두고 숨을 곳이 없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는 5·18 관련자들을 불순분자로 여기고 2중 3중의 감시로 억압했다. 양기남 기동타격대동지회장은 "형사들이 매일 자신의 근무처를 감시하기 위해 맞은 편 2층 다방에서 하루 종일 앉아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활동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다시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와 다시 투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기동타격대 동지회원들은 힘은 들었지만 정체성을 당당하게 내세웠다.

전국에 광주 10일간 항쟁을 최초로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5·18 관련 비디오 테이프 판매 등으로 동지회 활동 자금 확보에 주력했다.

'넘어 넘어' 저자 이재의씨는 "기동타격대원들이 책 판매에 크게 기여했다"면서 "이들의 적극적인 5월 정체성 찾기 노력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기동타격대 동지회는 생계에 몰두하기보다 1988년 주남마을에서 시신이 나오는 것을 계기로 암매장 발굴에 모든 역량을 기울였다. 이재춘·양기남·박인수·김현채씨 등이 중심으로 평민당 정상용 의원실과 '암매장 진상본부'를 조직해 3년여 동안 매달려 자체적으로 암매장 예상 지도 2권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4·13호헌 철폐운동의 중심에 섰다. 체육관에서 대의원에 의해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국민적 거센 요구를 받은 직선제를 거부하자 반발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1987년 박종철 고문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6·10 항쟁 기간에 보여준 기동타격대 동지회의 투쟁은 드라마틱하다. 타격대원들이 책 '넘어 넘어'와 5·18테이프 판매 수익금으로 양기남씨 등이 주축으로 1t 트럭을 운전하며 광주시내에서 빈병을 구입해 남평 드들강 다리 밑으로 에서 화염병을 제작해 다시 광주시내 시위현장에 배급해 계엄군처럼 악명이 높았던 백골단과 맞설 수 있었다. 백골단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던 터라 기동타격대원들은 백골단 체포에 나서는 결기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니 이들의 왕성한 투쟁 의지는 전두환 정권에서 직선제 개헌 등을 골자로 한 6·29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는 인색하지 않다.

기동타격대동지회의 투쟁은 노태우 정권 때에도 전국을 다니며 5월 진상을 알리고 군부 정권 타도에 앞장을 섰다. 전두환, 허삼수, 허화평 등 집앞에서 1년 365일 생업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천막농성을 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광주 5월은 전국적인 이슈화로 부상했다. 국회 5공 청문회가 구성되고 이재춘씨를 비롯한 주남마을 버스습격사건 유일 생존자 등이 청문회 증인으로 나와 공수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광주의 진실을 폭로에 안방에서 청문회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경악했다. 이씨는 이후 서울과 지방의 주요 대학에도 초청돼 광주의 참상과 5월 전사들의 투쟁담을 전했다. 그가 '도청을 마지막 사수한 사람'이라고 소문이나 많은 학생이 그의 강연을 들으려 모였다고 한다.

기동타격대는 강경대 열사 등 광주의 진상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이들이 5·18 묘지 조성 등에 앞장섰다. 특히 기동타격대원들은 끊임없는 학습과 자체적인 민주화 공부로 5·18을 영어판으로 출판하는데 이재호 부대장을 비롯한 나일성씨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다.

기동타격대동지회는 1991년 결성된 5월항쟁동지회(오항동)에 편입되면서 소강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1992년 김영삼 정권에서 보상금이 나오면서 오항동에 갈등이 생겨 11개 단체로 분화, 광주시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기동타격대 동지회원들은 자신들의 분신과 같았던 상무대 영창 보존과 도청 별관 철거 반대 투쟁에서 항쟁의 주체 세력이면서도 지역사회 지도층의 잣대와 판단에 휘말려 또다시 아웃사이더임을 실감해야 하는 쓰디쓴 기억들을 갖고 있다.

기동타격대는 상무대 영창 보존 투쟁을 마친후 5월 항쟁 상징인 전남도청 별관 철거 반대에 다시 힘을 모아갔다. 그러나 2년간의 거센 반대에도 도청 별관 철거가 결정되자 무력감에 빠졌다. 대원들은 매일 폭음 등으로 건강을 해쳐가고 2008년에는 같은 이유로 우울증에 시달리던 동지가 정체성을 지키다 쓰러져 갔다. 그런데 불과 10여년 만에 다시 도청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바라보는 타격대동지회원들은 찹착한 마음이다.

기동타격대 동지회원들은 지난해 12·3일밤 윤석열 전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비상계엄에 분노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윤대통령이 파면 탄핵됐지만 계엄이라는 공포감을 불러온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김공휴 5·18부상자회국장은 "그날 밤 계엄 선포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회원들과 밤새도록 뉴스에 귀 기울이며 소통을 하면서도 혹여 다시 총을 잡아야 하나 긴장감을 떨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기동타격대원들은 "광주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뛰어들었던 초심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면서 무엇보다 새정부에서 광주정신이 헌법전문에 반드시 수록돼길 간절히 바란다"고 희망과 함께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박승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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