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노래, 평등과 생명의 노래

김준기 2025. 7. 1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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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326) 김용휘,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5.
사진=알라딘

필자는 몇 해 전에 강원도 내륙 곳곳의 '해월길'을 답사한 적이 있다. 동학 하면 경주가 있는 영남이나 정읍과 전주가 있는 호남을 떠올렸던 나로서는 뜻밖의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정선 함백산에 있는 정암사 적조암 터였다. 자장율사가 창건한 적멸보궁 정암사의 말사 적조암이 있던 그 터는 자장율사가 입적한 곳이다. 함백산 자락의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그 터에서 필자는 하늘과 땅, 우주와 생명의 기운을 실감했다. 적조암에 머물며 동학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절치부심했던 해월의 서사가 남아있는 곳에서 그의 뜻을 새기는 시간이었다. 

적조암 터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아늑한 숲이다. 해월이 머무른 그 터에서 나는 바람 결에 빛나는 나뭇잎 소리를 들었다. 천년의 긴 세월 오롯이 익어 자장이 떠난 곳 해월이 찾아든 곳. 하늘과 땅은 단 하루도 쉬지 않으니, 최보따리 선생님도 쉬지 않고, 가는 곳마다 나무 심고 꽃을 피우며, 말과 발과 일과 책으로 큰 뜻을 펼쳤다. 아이와 여자 밥 한 그릇, 물 한 방울의 가르침으로, 사람의 마음 속 하늘을 길러 내어 사람과 만물을 하느님 같이 섬기고, 개벽 세상의 새 길을 열어간 해월. 크게 밝은 산, 함백산에서 해월의 노래, 평등의 노래를 불렀다. 자장의 길에서 함께 불러보는 해월의 노래. 그것은 생명의 노래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여 해월 최시형의 삶으로 완성되었다. 수운의 공부와 깨달음에서 나온 개벽 사상은 동학의 우주와 생명, 인간의 관계를 재정립한 철학적 전환이었다. 수운의 동학은 해월의 말과 발과 일로 인해 이 땅의 사상으로 체화했다. 저자가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해월의 생애에는 피와 땀과 눈물이 담겨있다. '탄생과 성장, 수운을 만나다, 은거와 수도, 이필제와 영해교조신원운동, 참회와 사십구일 공부, 동학재건과 개접, 경전 간행, 육임제와 포덕, 전라도 포덕과 내칙·내수도문 반포, 교조신원운동, 동학농민혁명, 도통전수와 향아설위, 체포와 순도'에 이르는 과정은 '길 위의 철학자' 해월의 삶이 잘 담겨있다. 해월의 도피생활 34년에는 서세동점의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새로운 동북아 국제질서의 확립과 이에 따라 기울어간 조선이라는 나라와 민중의 신산한 운명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해월 최시형은 평민의 신분으로 수운 최제우를 만나 동학의 2대 교주로 살면서 높은 정신적 경지에 이른 철학자이다. 이 책에서 내세우고 있는 평민철학자라는 말은 조선이라는 성리학적 유교 국가의 엘리트가 아닌 피지배 계층의 철학을 세운 인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침탈하고 있던 19세기 후반, 중국 중심의 동북아시아 질서가 일본 제국의 패권주의 질서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조선의 혼란은 경천동지의 시간이었다. 이렇듯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나타난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은 종교이면서 학문이었다. '도수천도학즉동학(道雖天道學卽東學)'라는 말은 '종교로 말하자면 천도이지만, 학문으로 말하자면 동학'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의 유교가 완고한 계급 질서에 기반을 둔 것인 반면, 수운의 동학사상은 신분제를 넘어선 평등 사상이었다. 해월은 수운의 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삶과 사회 속에 구현한 실천 철학의 큰 선생님이다. 저자가 간명하게 정리한대로 해월은 "말과 삶, 사유와 실천, 신앙과 존재를 통합"하고자 했다. 이 책은 해월 최시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구한다. 사람들은 해월을 천도교 2대 교주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 기억한다. 저자는 해월을 철학자이자 수행자로 재조명한다. 동학의 핵심 가치인 '시천주, 인내천, 수심정기, 이천식천' 등의 핵심 가르침을 해월의 삶과 실천 속에서 찾아내는 이 책은 '몸으로 하는 공부'와 '살아 있는 수행'를 이야기한 그의 뜻을 탁월하게 펼쳐보이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대구대 김용휘 교수는 '동학의 시천주 사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환경운동과 동학 연관 종교와 교육운동, 공동체실험 등을 해오고 있으며, '동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의 철학, 문명 전환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이렇듯 책으로 공부하고 운동으로 다시 공부하는 철학자 김용휘의 관심사는 해월의 실천을 통하여 굳건히 자리잡은 동학의 핵심을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하는 보편성을 가진 실천철학으로 재해석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동학을 130년 전의 혁명을 이끈 정신적 가치로 박제화하지 않고, 이 시대를 밝히는 새로운 등불로 재점화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뜻은 다음의 문장에 잘 담겨있다. 

"지금 우리는 다시개벽의 문명적 대전환기를 살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정말 특별한 시기를 건너고 있다. 지금 이 시기는 절멸적 위기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이기도 하다. 예전엔 몇몇 영적 천재들만이 이루었던 정신적 성취를 이제 보통 사람들도 이룰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 내면에 있는 신성의 불꽃이 깨어나고 지혜가 밝아지고 의식의 진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수운과 해월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한울님을 발견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새로운 존재로 깨어나고 고양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인류의 정신이 한 단계 높아지고, 품격 있는 도의적 생태문명을 열어낼 수 있길 간절히 열망한다."

19세기 산업혁명 이래 20세기의 자본주의 시대는 21세기 동시대를 기후위기와 문명위기의 절벽으로 내몰고 있다. 이렇듯 서구가 앞서 개척한 물질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 시대의 철학은 생명과 평화라는 보편가치를 회복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자는 동학의 개벽사상과 딱 맞아떨어진다.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서구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동학사상은 19세기 후반 내내 주유천하 하면서 당대의 현실 속에서 평등과 생명의 사상을 펼친 해월의 삶 속에 오롯이 녹아들어 있다. 19세기 조선에 등장한 해월의 철학은 21세기 동시대 지구를 구할 해월의 노래로 되살아나고 있다. 국가와 인종, 남녀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이 더욱 커져가는 이 시대를 넘어서는 해월의 노래는 평등의 노래다. 기후위기로 인한 지구의 위기를 넘어서는 해월의 노래는 생명의 노래다.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학사, 석사, 미술학 박사.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미술평론가.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시립미술관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