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와 표해, 애월이 기억하는 바다의 기록
제주의 진가는 멋진 관광지에만 있지 않다. 중산간부터 바닷가까지 긴 세월에 걸쳐 주민들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곳, 바로 마을에서 더욱 멋진 제주를 만날 수 있다. 2025년 새해를 맞아 심규호 중국학회회장이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제주 마을로 향한다. 심규호 회장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마을 이야기를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보자. [편집자 주]
애월의 속살을 만지다 - 애월포구와 진성
현재의 애월읍은 전체 24개 법정리와 26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 해안가 마을과 중산간 마을로 나눌 수 있는데, 해안가 마을은 하귀리(1,2리), 구엄리, 중엄리, 신엄리, 고내리, 애월리, 곽지리, 금성리 등이고, 중산간 마을은 광령리(1,2,3리), 상귀리, 수산리, 고성리(1,2리), 유수암리, 장전리, 소길리, 용흥리, 상가리, 하가리, 납읍리, 어음리(1,2리), 봉성리 등이다. 동쪽으로 제주시 외도1,2동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 서귀포시 안덕면, 서쪽으로 한림읍과 접해 있다.
조천읍 조천리처럼 애월읍도 애월리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애월 해안가의 크고 작은 카페와 레스토랑, 고급 펜션이나 호텔 말고 애월의 옛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부터 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애월포구이다. 애월포구의 맨 바깥은 '큰 돈지', 맨 안쪽은 '족은 돈지', 가운데는 '셋 돈지'라고 불렀으며, 배를 매어두는 포구는 '뒷개'라고 불렀다.
포구浦口와 항구港口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전자는 강이나 하천이 모여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이르고, 후자는 원래 강의 지류를 의미했으나 나중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곳을 지칭했다. 그렇기 때문에 항만港灣이란 말을 하지만 포만浦灣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포구는 왠지 작고, 항구는 크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로 말미암는다. 여하간 애월포는 지금의 애월항에서 동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땅 밑을 흐르다 애월리 이곳저곳에서 솟구친 용천수가 한데 모여 내를 이루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포구를 따라 하물 쪽으로 걷다보면 왼쪽에 애월진성 표지판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제 애월진성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일부 성벽뿐이다. 그 옛날 진성의 성벽은 지금 애월초등학교의 담장으로 살아남았다. 문득 한양의 외곽을 두르는 성벽 일부가 어염집의 담장 노릇을 하고 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세월의 무심함이랄까?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라도 살아남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고맙다.
제주는 물론이고 경향 각지에 성문과 성곽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일제의 읍성철폐령 이후의 일이다. 진성을 에워싸고 있던 돌은 항구를 만든다고 바다에 매립되었으며, 성문의 현판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그러니 일부라도 남아 있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애월초등학교로 들어갔다. 교목인 까닭인지 장성한 해송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1923년 제주도내에서 여섯 번째 공립보통학교인 신우新右 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했으니 개교 100년이 넘었다. 정문 앞에 족히 100년은 넘었을 아름드리 참느릅나무가 그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애월의 큰 물 - 하물과 장공물
"하물깍 메와지민(메워지면) 애월에 사름(사람) 안 나고, 과납(납읍納邑)에 마소가 죽나."

한라산 어딘가에서 깊고 어두운 곳을 지나 스스로 솟구치는 용천수, 하물은 여전히 콸콸, 활기를 잃지 않았다. 지금도 큰길가 옆에 자리하고 있는 하물터는 환하게 툭 터져 있으며, 애월 사람들의 좋은 쉼터로 활용되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 물놀이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물소리만큼이나 청아했다.

하물이 어떤 물인가? 1987년 한국자연보호협회가 지정한 한국 명수 100곳 가운데 하나 아니던가? 사계리 산방굴사 약수, 아라2동 금산물, 서홍동 지장샘, 외도동 수정사지 경내 샘 등과 더불어.
애월의 표류객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다. 바다는 육지의 끝이지만 육지의 끝이 바다의 시작이기도 하다. 들고나는 자에겐 바닷길이 있고, 생계를 의지하는 이에겐 바당밧(바다밭)이 있다. 하지만 풍랑을 만나 떠도는 이에게 바다는 삶과 죽음의 언저리이다. 그래서 바다로 향하는 이들은 바람을 기다린다. 조천의 후풍관候風館이 바로 배 띄우기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후候는 살피다, 기다리다는 뜻도 있지만 고대에는 닷새를 '일후一候'라고 불렀다. 지금도 중국에선 후온候溫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 5일간의 평균 온도라는 뜻이다.
정운경鄭雲經(1699~1753)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부친 정필녕鄭必寧을 따라 제주에 왔다가 지은 탐라문견록(정민 역, 휴머니스트, 2008년)에 제주민의 표류에 관한 기록이 채록되어 있다. 제1화는 1687년 조천관 주민 고상영의 안남국 표류기이고, 마지막 제15화는 어떤 사람의 이상한 섬 표류기이다. 류큐 열도를 비롯하여 대마도, 양구도, 옥구도 등 일본에 표착한 경우가 제일 많고, 이외에도 타이완과 안남국 등이 있다. 바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섬사람들에게 표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많은 표류객들 중에 살아온 이들보다 끝내 생환하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제주 출신으로 구사일생 생환하여 그 기록을 남긴 표류객으로 조천에 무신武臣 이방익이 있다면, 애월에는 문신 녹담거사鹿潭居士 장한철張漢喆이 있다.
장한철의 발분저서 표해록
애월에 살던 청년 장한철은 향시에 합격한 후 1770년(영조 46년) 과거에 응시하러 육지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하지만 얼마 후 풍랑을 만나 정처 없이 표류하다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 열도의 무인도인 호산도에 표착했다. 한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해적들을 만나 곤경에 처하고, 겨우 안남(지금의 베트남) 상선에 구출되었으나 안남 세자가 제주에 표착했다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으로 인해 또 다시 망망대해로 내쫓기고 만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오가다 마침내 청산도에 표착하게 되는데, 이미 함께 표류했던 29명 가운데 21명이 불귀의 객이 된 후였다. 장한철은 청산도에서 1771년 정월 초6일부터 13일까지 7일 동안 유숙하면서 현지 사람들의 위로와 보호를 받았다. 표해록에서 청산도 주민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고마움을 표시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가 그곳 여인과 하룻밤의 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일행은 제주로 돌아가고, 그는 한양으로 가서 식년전시에 응했으나 그만 떨어지고 만다. 귀향한 후 그는 자신의 표류 체험을 정리하여 표해록을 남겼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대정현감, 강원도 흡곡현령歙谷縣令 등을 역임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강원도 통천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녹담집鹿潭集을 남겼다.
장한철은 분명 어릴 때부터 촉망받았던 젊은이인 듯하다. 과거를 보러 떠나는 길에 동무들이 함께 한 것은 애월민들의 기대가 그만큼 컸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에게 바다는 좌절을 맛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극복하고 발분하여 표해록을 남기고, 계속 정진하여 급제하였으니, 발분저서發憤著書의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한라일보 진선희 부국장은 제주바당 표류의 기억(민속원, 2017년)에서 장한철 표해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전적 해양문학의 특징으로 꼽히는 바다와 모험, 고난을 헤쳐 가는 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찍이 국내 해양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혀왔다. 인생의 위기나 전환점에 직면해있는 표해록의 작중인물들은 '그들에게 바다(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63쪽)
장한철의 표해록은 2006년 정병욱이 번역하여 범우사에서 출간했고, 이후에도 두 권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표해록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장한철의 6대 종손인 장한규張漢奎의 역할이 크다. 제주 최초의 의생이자 시화에 능한 문인이었던 그는 강원도에 사는 장한철의 직계 후손에게 표해록 원본을 얻어 집안에 보관했으며, 이를 물려받은 후손이 국립 제주박물관에 수탁했기 때문이다. 표해록은 2008년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장한철 생가에서

장한철 생가에 왜 이 그림을 사용했을까? 난해하다. 탐라순력도에 애월에 관한 그림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있다. 「애월조점涯月操點」 탐라순력도 제33번째 그림이다. 1702년 11월 14일, 애월진의 군사와 말을 점검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미 사라진 애월진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그림이다. 애월진성은 남문과 서문이 있는 원형의 성이며, 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설치되어 있고, 성문 앞에 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점은 제주목사가 직접 나서서 군사훈련 및 군기 점검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제주목 외에도 대정과 정의현, 그리고 9개의 진성에서 실시되었다. 제주목사가 참가하지 않는 경우는 조점 대신 점부點簿라고 했다. 「모슬점부」나 「차귀점부」가 그 예이다.

애월의 학맥
장한철은 애월의 서생이자 사인仕人이며, 표해록, 녹담집을 남긴 문인이다. 장한철이 어찌 뜬금없이 나타난 이겠는가? 그 이전에 그에게 한학을 가르친 이가 있을 터이고 그 이후에도 학맥을 이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국립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제주에는 제주목(1392년)과 정의현(1416년), 대정현(1420년) 세 곳에 향교가 설립되었고, 이보다 규모가 작은 학당은 19세기에 세워졌다.

얼마 전 제주문화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한학에 몰두하고 있는 학인에게 애월 문인이 쓴 한시집(번역본) 한 권을 얻었다. 학인의 조부인 김성옥金成玉(1902~1984년. 훈장 역임)의 유품을 정리하다 5대조인 김인현金仁賢(1848~1933년. 경주 김씨 입도 17세손)의 한시집과 만서등기輓書登記 등을 발견하여 한문에 조예가 있는 몇 분이 초벌 번역한 것이었다. 대부분 7언율시이고, 다양한 소재와 전고 활용으로 볼 때 학문의 깊이와 너비가 대단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만서등기는 김인현이 돌아가셨을 때 받은 만시輓詩와 물품 기록이다. 주로 애월읍 소재 곽지, 상가, 하가, 금성, 가시리 등지의 학인들이 보낸 만시들로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이 가득 담겨 있다. 이를 통해 김인현의 인품과 덕망을 능히 알 수 있을 뿐더러 애월읍 학인들의 지적 수준이 상당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