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도 용서되는 ‘공포의 집’ [가정폭력 살인, 반복된 ‘시그널’·(上)]
하루 492건 신고 462건 ‘없던 일’
정식 사건 접수땐 가정 파탄 걱정
47.3%, 배우자 폭력 심각하지않다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할 가족이 ‘가정폭력’ 가해자로 돌변하는 순간, 포근한 안식처였던 ‘집’은 ‘공포의 공간’이 되고, 일상을 속속들이 잘 아는 ‘관계’는 ‘억압의 고리’로 변한다.
이른바 ‘친밀한 관계’인 전·현 배우자나 연인 등에 의해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들이 우리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화성 동탄 납치 살인, 대구 스토킹 살인에 이어 인천에서 벌어진 ‘부평 가정폭력 살인’ 사건. 아내를 흉기로 위협한 혐의로 처벌받은 남성이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이 풀린 지 1주일 만에 결국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다. 그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순 없었을까. → 그래프 참조·관련기사 10면·편집자 주

“남편이 저를 때려요.” “옆집에서 비명이 들려요.”
하루 평균 ‘492건’.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다거나, 옆집 등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112 신고가 지난해에만 총 17만9천923건에 달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전국에서 접수된 112 신고 중 경찰이 정식으로 수사에 나선다는 의미의 ‘입건’ 단계로 넘어간 사건은 전체의 6.1%(1만924건)에 불과하다. 나머지 93.9%(16만8천999건)는 ‘범죄’로 인정되지 않고 ‘종결 처리’됐다. 하루 평균 492건 중 462건이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수많은 가정폭력 사건이 수사도 개시되지 않은 채 종결되는 주된 이유는 가정폭력의 ‘반의사불벌’ 조항에 있다. 형법에 따라 폭행, 협박 등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히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 반의사불벌죄는 가족 구성원 간 발생하는 폭행과 협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익명을 원한 인천 모 지구대 한 경장은 “분명히 피해자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신고해 출동했는데, 막상 사건 현장에선 피해자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말하거나, 가해자를 감싸면서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한다”며 “이러한 경우에는 피해자를 가해자와 분리한 뒤 사건을 접수하라고 설득하지만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경찰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온 가족을 당장 체포해 처벌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피해자는 얼마나 될까. “정식으로 사건을 접수하겠느냐”는 경찰관 물음에 피해자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경찰관이 돌아간 뒤 가해자의 보복이 이어질까 두려워하거나, 정식으로 사건이 접수되면 가정이 파탄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변호사는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경찰에 신고해 사건이 정식으로 접수되는 순간, 피해자의 삶도 송두리째 흔들릴 위기에 놓이는 것이 가정폭력”이라며 “피해자들은 가정 해체로 인한 생계 위기나 남은 가족 구성원이 겪게 될 혼란 등을 고려해 사건 접수를 포기한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가 발간한 ‘2022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전국 남녀 416명 대상)를 보면, 배우자로부터 당한 폭력행위에 대해 피해자들은 심각하지 않다(47.3%)고 여기거나, 그 순간만 참으면 된다(17.5%)는 이유 등으로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괜찮으니 돌아가세요.” 그나마 112 신고를 통해 도움을 요청했던 피해자 대부분은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폭행, 협박, 폭언 등 배우자로부터 당한 각종 폭력행위를 ‘없던 셈 치겠다’며 출동한 경찰관을 돌려보낸다. ‘이번만 참으면 괜찮겠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두려움 속에서도 그렇게 위안을 삼은 채….

/정선아·송윤지 기자 s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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