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탁월한 각색·연출로 보여준 ‘불완전한 인간과 신념’ 

한형진 기자 2025. 7. 1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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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사자자리 연극 ‘더러운 손’
연극 '더러운 손' 출연진, 제작진 / 사진=사자자리

혼돈의 시대 속 이념과 신념,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한국적인 각색과 잘 정돈된 연출로 보여준다. 2시간이란 공연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은 수작이라 부를 만 하다. 

11일부터 13일까지 공연장 비인에서 열린 제주 극단 사자자리의 신작 '더러운 손'은,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1948년에 발표한 동명의 희곡(Les Mains sales)을 공연했다. 

이 작품은 전쟁 중인 동유럽의 가상 국가가 배경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은 이상을 꿈꾸며 공산주의 정당에 투신한다. 정당의 대표 격인 서기장은 전쟁 막바지에 다른 정치세력과 협상을 통해 국정 안정을 추구한다. 이런 시도를 용납할 수 없는 주인공은 당 안에서 서기장 암살 임무를 받고 비서로 잠입한다. 주인공은 서기장의 진솔한 언행에 감화되지만, 주인공의 아내와 서기장이 정을 통하면서 가까스로 암살에 성공한다. 주인공은 수감 생활을 끝내고 출소했지만, 그에게 암살 임무를 내린 옛 동료들은 오히려 주인공을 제거하려 든다. 무엇보다 숨진 서기장이 추진하려던 방향이 그대로 유지된 것을 확인하면서, 주인공은 극도의 혼란과 함께 비로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

사자자리의 '더러운 손'은 원작의 줄거리를 거의 온전히 유지하면서, 2025년 한국 상황에 어울리도록 각색했다.

전쟁 중인 20세기 말 동유럽의 가상 국가는 21세기 대한민국으로 설정했다. 원작의 파시스트 정당은, 다른 나라 군대(황국신민군)를 끌어들여 내전을 촉발시킨 집권당인 자유당으로 각색했다. 주인공이 몸담은 공산주의 정당은 내전을 주도하는 민주혁명당으로 탈바꿈 했다. 부르주아·민족주의를 표방한 정당은 연극에서 온건 중도 보수 성향의 평민당으로 각색했다. 이렇게 작품은 원작에도 등장하는 세 부류의 정치 세력을 한국 상황에 어울리도록 절묘하게 각색했다. 특히 윤석열이 주도한 친위쿠데타를 불과 수개월 전에 목도했기에, '더러운 손'의 설정은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지지한다"는 자유당, 개혁에 소극적인 평민당, 진보를 표방하는 민혁당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실제 존재했던 정당 명칭이기도 하다. 역사 속 정당의 성격과 작품 속 성격도 어느 정도 부합하게 설정한 점이 눈에 띈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내전이라는 배경으로, 연극 '더러운 손'은 정치, 조직, 신념, 인간다움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특히, 정당 대표의 비서인 주인공 현오(배우 조성진)와 대표 노경(현지훈)의 대화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하루라도 빨리 안정시키기 위해 평민당과 자유당 소장파까지 끌어들이는 합의가 필요하다는 노경에, 현오는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낸다.

현오는 '인간은 불완전하다, 원칙은 완전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민혁당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현오의 말에 노경은 '원칙은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이 목적'이라고 받아친다. 인간 집단이 내세우는 숭고한 가치와 이념도, 인간성을 발 딛고 있지 않는다면 허상에 불과하다고 꿰뚫어본 셈이다.

현오와 노경의 대립은 노경 사망 이후에 더욱 크게 다가온다. 결국 현오가 당내 파벌 다툼에 쓰인 도구에 불과했다는 결말에 이르러, '원칙은 수단, 인간이 목적'이라는 노경의 설파는 한층 더 증폭된다. 

결국 현오는 자신을 다시 써먹을지 혹은 제거할지 따지려 하는 동지들에게 '(난) 노경을 아직 죽이지 못했지만, 이제는 정말 죽이겠다'면서 자신을 향해 "재사용 불가"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울리는 총소리와 함께 연극은 막을 내린다. 작품의 마지막은 불완전한 인격체의 비극을 보여주는 동시에,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극적인 장면이다. 
연극 '더러운 손'의 주인공 현오가 "재사용 불가"를 외치는 순간 / 사진=사자자리

작품은 등장인물의 면면을 통해서도 인간의 불완전함을 비중 있게 다룬다. 폭탄 테러에 자신의 비서를 몸으로 막아줄 만큼 탈권위적이고, 엄중한 시국에서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노경마저 현오의 아내 은조(이하나)의 솔직하고 당돌한 유혹에 무너지고 만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현오의 주장도 맞는 셈이다.

내란 종식, 적폐 청산보다는 정당의 입지에 더 관심을 보이는 평민당 총재(이동훈), 정당 내 부조리함을 인지하면서도 '명령은 절대적'이라며 눈감는 인우(최성연), 당내 경쟁자인 노경의 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암살까지 사주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 위치에 올라서는 별반 다르지 않게 행동하는 여산(이동훈)까지. 

이광호 연출자의 설명처럼 "이 작품에서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고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하나 결국 딜레마에 직면한다." 오히려 가난이 싫어 정당에 입당했고 상대방 직책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려는 노경의 경호원 남수(오상운)를 통해, 엘리트와 지도층을 꼬집는 인상도 받는다.

2025년을 지나는 오늘 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더러운 손'의 질문은, 제작진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 덕분에 2시간이라는 제법 긴 공연 시간에도 몰입력을 잃지 않는다.

연극 '더러운 손'의 공간 배경은 민혁당 사무실, 노경의 집무실, 현오·은조의 방 등 주로 실내 공간이다. 작품의 무거운 분위기를 감안해 무대 전반은 검정색을 띄는 동시에, 최대한 단순화된 구성을 추구했다. 특히, 무대 중심에 설치된 전등은 흡사 허름한 경찰서 취조실에 등장할 법한 소품으로 쓰였는데, 막이 전환될 때마다 이 전등이 꺼진다. 작지만 나름의 고민이 담긴 셈이다.

섬세한 연출은 배경 음악에서도 나타난다. 작품 안에서는 막이 바뀔 때마다 같은 음악이 계속 흐른다. 바로 '벨라 차오'(Bella Ciao)다. 이 곡은 1945년 전후로 이탈리아 반파시즘 대항군들 사이에서 불린 곡으로 알려진다.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이 곡은 작품 내용과도 잘 어울리는데, 제작진은 '벨라 차오'를 통기타 버전부터 전자음악까지 다양한 느낌으로 편곡해 막이 바뀔 때마다 어울리는 위치에 배치했다. 극 중에서 현오와 노경은 '벨라 차오'를 함께 부르며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순간에는 주인공 현오의 쓸쓸한 목소리로 '벨라 차오'가 흐르면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데, 십분 의도된 인상적인 연출이다. 

연극 '더러운 손'의 대사는 관념적이거나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게 짧은 호흡으로 관객의 피로감을 낮췄다. 그러면서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대사들도 놓치지 않고 배치했다. 막과 막을 잇는 진행도 곁가지 없이 핵심 위주로 다루면서, 공연 시간을 감안해도 진행이 느리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본인이 정치에 대해 관심이 높다면 더 흥미진진하게 관람했으리라 생각한다.
현오가 노경을 암살하는 장면 / 사진=사자자리

작품 출연진은 조성진(현오 역), 현지훈(노경 역), 이하나(은조 역), 이동훈(여산·평민당 총재 역), 오상운(남수 역), 최성연(인우 역)까지 모두 6명이다. 

최성연은 그 또한 조직이란 기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부품에 불과함을, 오상운은 우직함과 시기심을, 이동훈은 권력욕을 중시하는 태도는 같은 두 정치인을, 이하나는 조건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본인 감정에 충실 하는 마음을, 현지훈은 어떤 위인도 사실 한 명의 인간임을, 그리고 조성진은 신념에 눈이 가려 정작 주변과 스스로를 보지 못한 존재를 연기했다. 출연진들은 인물들이 지닌 저마다의 딜레마를 무대 위에서 잘 보여줬다.

연극 '더러운 손'은 두 가지에 있어 제주 연극계에 의미를 남긴다. 첫 번째는 AI 기술의 활용이다. '더러운 손'은 모니터 속 영상으로 공연이 시작된다. 영상은 황국신민군의 개입과 각종 소식을 뉴스 보도 형태로 알려주는데 AI 기술로 제작했다. 

Chat GPT를 필두로 한 생성형 AI는 어느새 제주 연극 무대에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 6월에 열린 극단 '예술공간 오이'의 4.3 창작극 '낭땡이로 확 쳐불구정 허다'의 도슨트 버전 공연에서도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가 배경으로 쓰였다. 연극 포스터 제작에는 익히 사용된 바 있다. 생성형 AI 기술이 갈수록 고도화되는 만큼, 연극 예술 안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쓰일지 기대감이 든다.

두 번째 의미는 협업이다. '더러운 손' 출연진 6명 가운데 최성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극단 '사자자리'에 속하지 않은 객원 형태로 이번 작품에 참여했다. 올해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예선 대회에서는 마찬가지로 대부분 객원으로 구성한 퍼포먼스단 몸짓이 사상 첫 최고상을 타며 본선대회에 제주 대표로 참여한다. 비교적 긴 역사를 지닌 제주 극단들이 작품이나 출연진에서 기존 레퍼토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신생 극단이나 몸집이 가벼운 극단들은 유연한 협업을 통해 의미있는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소속을 넘나드는 제주 배우들의 협업과 함께, 전문화된 연출 등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관객의 마음이다.

제주 극단 '사자자리'는 지난 2023년 6월 창단 공연을 가진 신생 극단이다. 제주에 정착한 이광호·최성연 부부 연극인이 운영한다. '사자자리'는 프랑스 현대 작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의 대표 희곡을 다룬 2인극 '아무 것도 아닌 일로'를 통해 시작을 알렸다. '더러운 손' 역시 프랑스 철학자 겸 작가 사르트르의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이광호 사자자리 대표가 프랑스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 연극을 공부한 배경의 영향이 크겠다. 

'더러운 손'은 한국 공연을 검색하면 한 두개 정도에 불과할 만큼, 그동안 국내에서는 쉽게 만나지 못한 작품이다. '사자자리'를 통해 앞으로 흥미로운 작품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연극 '더러운 손'을 본 관객들도 비슷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