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들이 ‘연구자공제회’를 만든 이유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5. 7. 13. 16:2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8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2025 여성노동자대회’에서 필자가 발언하고 있다. 김호세아 제공

김강리 |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수석부지부장

대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고 처음으로 한 일은 학교 누리집에서 조교 모집 공고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 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학내 장학금은 기대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릴 형편이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학업을 이어 나가야 했다. 다행히 학생 조교로 뽑혀 도서관에서 대출·반납 업무를 맡을 수 있었다. 사서분들께서 편의를 봐주신 덕에 4학기 연속해서 근무할 수 있었고, 덕분에 등록금 일부를 감면받을 수 있었음에도 적지 않은 등록금은 늘 나를 압박했다.

거기다 생활비는 또 다른 문제였다. 때마침 친구가 재직 중인 회사에서 데이터 라벨링 작업을 할 사람을 구한다기에 그 일도 병행했다.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노트북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재택근무 형태였기에, 강의를 듣거나 조교로 근무하면서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운 좋게 동문회 장학생으로 선정되거나 학업보조비 지원을 받았고 지도교수님의 제안으로 대학혁신사업에 참여하면서, 학자금 대출 없이 수료하겠다는 작지 않은 꿈을 이뤘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은 순전히 정말 운이 좋았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서너개의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하느라 연구실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동기, 조교 장학금 지급일자를 알 수 없어 연신 발을 동동거리며 여기저기 전화를 하던 친구, 대학원생 신분으로는 신용카드 발급조차 되지 않아 인터넷은행 소액 대출로 급한 불을 껐다는 동료들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도 늘 운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참여했던 어떤 사업은 진행 도중 학교 측에서 예산 축소를 이유로 이 사업을 일방적으로 폐지하는 바람에 헛수고를 한 적도 있었고, 매 학기 다시 지원해야 하는 장학금은 선정자 수와 금액이 들쑥날쑥해 늘 애를 먹었다. 일이 있다고 해도 문제였다. 학교생활과 생계 활동을 동시에 해야 하다 보니 학업에 온전히 집중할 시간은 물론 체력도 늘 모자랐다. 생계를 위해 해야 했던 데이터 라벨링 아르바이트는 작업시간에 비해 급여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나에겐 절실했기에 매일 학생으로 강의를 듣고, 조교로 근무하고 난 뒤 나머지 시간을 활용해 작업을 해야 했다.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고 잠들어 버릴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다음날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작업량을 채워야 했다. 나는 가끔 만약을 생각한다. 만약, 나에게 조교 일자리와 장학금, 아르바이트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과연 나는 대학원을 무사히 다닐 수 있었을까.

나는 대학원생의 삶이 운으로 결정되지 않았으면 한다. 고작해야 지도교수의 품성이나 장학금 수혜 여부, 국고보조사업 선정과 학생 조교 선발 여부 따위가 우리 삶을 좌우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이에 지난 2017년 연구자들은 대학원생 연구비 부당 갈취부터 실험실 안전사고 등 대학원생의 노동 현장을 위협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를 설립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변화는 느리고 통장은 빠르게 비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 더 먼 길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대학원생은 물론 연구자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안전망이 되어줄 ‘연구자공제회’다.

다가오는 8월 출범할 연구자공제회는 상호부조의 원리에 기반한 연구 안전망을 꿈꾼다. 회원들이 십시일반 마련한 기금으로 의료 지원부터 소액 대출까지 불안정한 일상에 보탬이 되는 상품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논문 게재료 지원이나 학술 데이터베이스 접근권처럼 연구자로서 겪는 어려움을 해소할 혜택도 마련함으로써 학생·연구자에게 경제적 안전망이 되어줄 것이다. 또 연구자들은 2021년 연구자에 대한 국가적 책무를 일깨웠던 ‘연구자 권리선언’에서 더 나아가, 공제회에서 모인 연구자의 목소리로 법과 정책을 새롭게 써볼 예정이다. 더 이상 우리 연구자의 삶을 운에 맡겨서는 안 된다. 운에 끌려다니며 불안에 시달리지 말자. 우리에게는 우리를 구할 능력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새로운 세계에서는 말이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