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꽃도, 가을 단풍도…배롱나무의 매력 [황금비의 수목원 가드닝 다이어리]


황금비 |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천리포수목원 입구에는 가로 1.5m, 세로 1m 정도 크기의 식물 안내 게시판이 있다. 매주 60여장의 아름다운 식물 사진을 학명과 함께 붙여두는 게시판인데, 1주일 단위라고 하더라도 워낙 수종이 다양한 덕분에 지금 개화했거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식물을 중심으로 소개해야 해 아쉬울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닛사는 울긋불긋한 가을날의 단풍이 매우 아름다운 나무지만, 잎이 다 떨어지고 난 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축 처진 가지의 수형 역시 매력적이다. 석류나무는 가을철 주렁주렁 달린 붉은 열매가 인상적인데, 꽃이 피기 직전 마치 문어 모양으로 잘린 비엔나소시지처럼 끝이 여러 갈래로 벌어지는 꽃받침의 모습도 매우 특이하다.
사계절을 지나며 변하는 식물의 모습에는 돋보이진 않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한여름 분홍색, 보라색, 흰색, 붉은색 등 형형색색의 꽃차례를 선보이는 배롱나무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가로수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배롱나무는 알록달록한 꽃이 피는 여름철 주목을 받지만, 사실 배롱나무의 진가는 사시사철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매끄럽게 벗겨지는 부드러운 질감의 수피와 가을철 붉게 물드는 낙엽 덕분이다.
부처꽃과 배롱나무속에 속하는 배롱나무는 가을에 잎을 떨구는 낙엽소교목이다. 백일 동안 꽃이 피고 지며 긴 개화 기간이 이어져 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보통 7월 중순부터 9월까지 꽃을 감상할 수 있는데, 가지 끝에 달린 화려한 원뿔 모양의 꽃차례가 돋보인다. 꽃차례 끝에 3㎝ 크기의 꽃잎 6개가 한껏 벌어져 피고 그 가운데에 수술 40여개가 모여난다. 꽃잎이 마치 크레이프 종이처럼 주름지고 얇다는 의미에서 영어로 ‘크레이프 머틀’(Crape Myrtle)이라고도 불린다.
천리포수목원의 배롱나무는 크게 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늘정원에 각각 1972년, 1974년 도입된 흰배롱나무와 배롱나무가 마주보며 자라고 있다. 각각 충남 서산과 태안 모항초등학교에서 묘목으로 도입해 50년 넘게 수목원에서 자란 나무다. 큰 연못이 한눈에 보이는 수목원 초입 쉼터에서 매년 붉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2013년 도입되어 햇수로 13년을 자랐다. 굳이 가지치기를 해주지 않아도 둥그런 수형으로 예쁘게 자라 한여름 수목원 포토존의 주인공이 된다.

종잇장처럼 매끈하게 벗겨지는 수피는 배롱나무의 또 다른 매력이다. 누구든 설명을 들으면 한번쯤 손을 뻗어 촉감을 느끼고 싶을 정도로 매끈하게 생겼다. 단풍나무나 벚나무 역시 겨울철 매끈하고 독특한 수피로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배롱나무는 얇게 벗겨지는 밝은색의 수피와 아름드리 가지를 뻗은 수형 덕분에 더욱 눈길이 간다. 특히 일본 원산의 적피배롱나무는 그 이름처럼 붉은빛의 수피가 인상적인데, 수목원 중앙에 있는 논 옆에서 50년 가까이 자란 적피배롱나무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가을철 붉은색, 주황색으로 짙게 물드는 단풍 역시 볼거리다. 단풍과 함께 꽃차례 끝에 알알이 맺히는 배롱나무 열매도 고즈넉한 가을 풍경의 주인공이 된다.

남부 수종인 배롱나무는 최근 수도권의 도심 공원에서도 정원수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천리포수목원이 있는 태안군에는 태안읍~학암포까지 이어지는 거리가 배롱나무 가로수로 가꿔져 있어 꽃이 피는 계절 드라이브 하기 좋은 코스로 꼽힌다. 다만 추위에 취약한 수종이라 중부지방에서는 겨울철 큰 줄기에 보온재를 덮어주는 등 방한 조치를 해야 월동할 수 있고, 장마철 과습 피해가 심하면 흰가루병이 발생하거나 깍지벌레와 같은 해충이 꼬일 수 있어 사전 관리가 필요하다.
수목원의 업무를 최소한으로 덜어낸다고 했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남아 있을 몇 안 되는 업무 중 하나가 수목원 해설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해설 프로그램 운영은 가장 중요한 업무로 꼽힌다. 속한 부서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직원이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목원을 찾는 분들에게도 기회가 된다면 꼭 해설을 들으시라고 권한다. 365일 가운데 딱 하루 방문하더라도 사시사철 수목원을 가꾸는 가드너들의 눈과 경험을 빌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식물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봄이라면 갓 돋아난 풍나무 새싹이 가을에 얼마나 풍성하게 자라 붉게 물드는지를, 여름이라면 지금은 초록색인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한겨울에 빨갛게 익어 그 위로 눈이 내리는 풍경이 얼마나 아늑하고 아름다운지를 말이다. 해설이 끝난 뒤 탐방객들이 “이제 산책하다가 나무 다섯 종류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시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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