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에서 30년째 밥짓는 이탈리아인… 그가 한국 온 이유

[우리동네 히어로]김하종 신부

[편집자주] 평범한 일상 속 보이지 않는 영웅들이 있습니다. 각자 분야에서 선행을 실천하며 더 나은 우리동네를 위해 뜁니다. 이곳저곳에서 활약하는 우리동네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김하종 신부(빈센조 보르도)가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집에서 배식을 하고 있다.사진제공=김하종 신부.

#1998년 겨울밤 서울의 한 농산물시장. 한 외국인이 낡은 리어카를 끌고 시장을 돌며 상인들에게 팔다 남은 채소가 있는지 물었다. 그를 노숙인이나 도둑으로 생각한 일부 상인들은 욕설을 퍼붓거나 손찌검까지 했다. 리어카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돌아오기 일쑤였다.

경기 성남에 위치한 무료 급식소 '안나의 집'을 약 30년간 운영 중인 김하종(빈센조 보르도·68) 신부가 겪었던 일이다. 33세에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와 갖은 수모를 겪었던 청년 신부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김 신부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건 1990년이다. 그는 성남 신흥동성당의 배영섭 주임신부에게 "성남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곧장 낯선 한국으로 향했다. 김 신부는 성남을 중심으로 무료급식, 교육, 빈민 선교 등 활동을 펼쳤다.

현재 안나의 집에선 매일 900명이 넘는 이들이 찾아와 식사를 해결한다. 노숙인, 독거노인, 위기 청소년 등이 안나의 집의 식구다. 배식을 시작하기 전 김 신부는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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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신부에게 차가웠던 지역사회… '밥 짓는 진심'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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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집 초창기 김하종 신부가 일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김하종 신부.

안나의 집이 문을 연 건 1998년 7월이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로 노숙인이 급증하자 천주교 신자였던 오은용씨가 김 신부에게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라며 자신의 식당 한 층을 내어줬다. '안나'는 오씨의 어머니 세례명에서 따왔다.

안나의 집 식구들이 빠르게 늘자 김 신부는 성남동성당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성남동성당에서 무료급식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20년간 부지를 빌려줬다.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김 신부는 새벽마다 리어카를 끌고 시장으로 나갔다. 시장뿐 아니라 제과점, 결혼식장 뷔페, 사찰, 학교 등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당시엔 후원금이 없어 김 신부가 직접 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외국인인 김 신부를 경계하는 시선이 강했다. 한국어가 서툴어 소통 문제도 컸다. 김 신부는 "온종일 뛰어다녀도 빈손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럴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며 "우리 식구들이 굶을까봐 마음이 타들어 갔다"고 회상했다.

김하종 신부가 무료급식으로 제공된 식사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사진=박상혁 기자.

고마운 일도 많았다. 어느 날 쌀 한 톨도 구하지 못한 채 빈 창고를 마주했다. 김 신부는 모든 걸 내려놓고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쌀 포대 여러 개가 배달됐다. 안나의 집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이들이 보낸 것이었다. 도움의 손길 덕에 1998년부터 지금까지 안나의 집에서 제공한 무료급식은 250만명분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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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삶 접하고 '한국 봉사' 결심… "안나의집 사라지는 날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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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부의 고향은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인 피안사노다. 1982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이라는 설립 정신을 가진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에 입회했다. 신학생 시절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작품을 접하면서 아시아에 관심을 가졌다.

수많은 아시아 국가 중 한국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유는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삶을 보며 '한국에서 봉사의 사명을 다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한글 이름에는 당시 다짐이 담겼다. '김'은 김대건 신부를, '하종'은 하느님의 종을 의미한다.

김하종 신부가 1987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첫 미사를 드리고 있다. /사진제공=김하종 신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복음 25장 40절)

김 신부는 매일 가장 아끼는 성경 구절을 되새기며 밥을 짓는다. 고국에 홀로 있는 90세 어머니가 보고 싶지만, 한국을 떠날 순 없다. 자신의 사명이 끝나지 않아서다. 김 신부의 꿈은 안나의 집이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오는 것이다. 밥 굶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그는 오늘도 따뜻한 한 끼를 준비한다.

김하종 신부가 위기 청소년들을 찾아가 도움을 주는 '아지트'에서 위기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다./사진제공=김하종 신부.

박상혁 기자 rafandy@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