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 만나요, 남편은 허락했고요”…어제의 환상은 덤덤하게, 오늘의 선물은 감사하게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5. 7. 1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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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59]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생은 자신을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자에게만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한다.

‘패스트 라이브즈’(2024)는 첫사랑과 계속해서 어긋나는 한 여성을 통해 이 점을 보여준다. 그녀는 첫사랑과 어쩌면 이어졌을지도 모를 과거의 순간들을 전생처럼 여기기로 하면서 현생에 집중한다.

지금의 삶이야 말로 자신에게 허락된 최선이라고 받아들이고 그저 살아간다.

나영은 남편의 허락하에 첫사랑 해성과 재회한다. [CJ ENM]
12년만에 재회한 남녀, 여자는 도망갔다
영화는 어린 시절 헤어지게 된 남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은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키웠지만 오랜 시간 함께하진 못했다. 나영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하며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영과 해성은 서로의 첫사랑이었다. 그렇지만 나영이 캐나다로 이민하며 연을 오랜 시간 이어 가진 못한다. [출처=IMDb]
12년 뒤 남자와 여자는 상대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탐문한 끝에 연락하게 된다. 나영은 노라로 개명한 뒤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작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각각 한국과 미국에 있으며 화상통화로 소통하는 까닭에 애틋한 마음은 더 커졌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온라인으로만 연결돼 있었기에 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줬고, 여자는 ‘비현실’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온라인으로만 연결되기에 20대 때 두 사람의 만남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줬다. [출처=IMDb]
그래서 과감하게 끊어냈다. 분명 자신에겐 문학인으로서 큰 성취를 거두겠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계속 한국행 비행기 표 시간만 찾아보는 모습을 자각하고서다. 여자는 당분간 연락을 끊자고 통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에서 자신과 취향이 닮은 미국인과 결혼했다.
나영은 자신과 취향이 닮은 미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영주권 취득이라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지만, 관계의 중심엔 분명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출처=IMDb]
옛사랑과의 재회, 남편이 가로막지 않은 이유
그로부터 다시 12년이 지나고, 해성은 나영을 만나러 미국에 온다. 나영의 남편은 질투하면서도 재회를 말리지 않는데, 본인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낼 자격이 없지. 널 보려고 13시간이나 날아왔는데, 만나지 말라고 할 순 없는 거야. 어린 시절 사랑이잖아. 둘이 도망칠 것도 아니고.”

나영과 남편, 해성이 나란히 걷는 어색한 상황이 발생한다. [CJ ENM]
세 사람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나영의 남편은 자신만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을 받는다. 두 사람이 자기는 못 알아듣는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이따금 아내가 한국어로 잠꼬대할 때의 불안함과 유사했다. 본인은 모르는 세계가 아내의 내면에 있다는 데서 오는 거리감이었다.
나영의 남편은 오래 전부터 해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나영의 첫사랑이라는 것도. 그럼에도 남편은 아내가 첫사랑을 만나게 허용해준다. [출처=IMDb]
24년만에 만난 첫사랑은 좋았다, 하지만 더 나가지 않았다
첫사랑은 추억 속에 남겨둘 때 좋다는 말은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실물로 24년 만에 다시 만난 나영과 해성은 진짜 인연인 듯 친밀했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 나영의 이민이 없었다면 두 사람은 연인이 됐을 것이다. 12년 전 온라인으로만 대화하던 시기에 해성이 미국으로 왔다면, 두 사람은 부부가 됐을지도 모른다.
해성이 나영을 찾아 좀 더 일찍 왔다면 두 사람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영에겐 그저 가능성일 뿐이다. [출처=IMDb]
그러나 나영은 한발짝 더 내딛지 않는다. 애초 나영은 현재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영에겐 지금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서 최선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24년 전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채로 캐나다에 왔을 때처럼 말이다.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국에서 살게 된 나영은 그 조건 안에서 최선을 만들어냈다.

이민자로서 본인이 느끼는 이질감을 포착하고, 그것을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소설과 극본에 담아냈다. 같은 풋내기 작가로서 만난 미국인 남편과 서로 보듬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냈다. 그게 나영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해성은 그저 과거의 가능성이다. 어쩌면 그 자체로 전생인지도 모른다. 전생이 더 매력적이었다고 한들 현생을 떠나 전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시도를 하면 삶의 체계가 무너져 버린다. 인생이 후회로 물들어버린다.

자신이 운명의 사랑을 방해하는 악당이 된 듯해 괴로워하는 남편에게 나영은 말한다. “이게 내 삶이고, 지금 당신이랑 함께 하고 있어. 여기가 내 종착지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나영은 남편과의 삶 속에서 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가고 있었다. [출처=IMDb]
‘패스트 라이브즈’는 ‘전생’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나영이라는 사람이 지난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묘사한다. 우등생으로 한국에서 칭찬받았던 시기, 12년 전 첫사랑과 만날 뻔했던 순간, 어쩌면 더 좋은 기회를 발견했을지 모를 시간들이 그녀에겐 모두 ‘전생’일 뿐이다. 그녀에겐 현재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게 더 중요하다.

반대로 해성은 나영과 대조된다. 24년 전에도, 12년 전에도 과거를 잊지 못해 방황했다. 절대 잡히지 않을 옛날과 전생을 손으로 잡아보려 허둥댄다. 그사이 기쁨과 즐거움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 버린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을 대조하며 관객에게 묻는 듯하다. ‘어제’라는 환상에 취해서 살 것인지, 삶이 주는 ‘오늘’이라는 선물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이다. 인생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니 뒤돌아 한숨 쉬지 말고, 지금도 당신 옆을 지나가고 있는 삶의 경이를 만끽하라고 말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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