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합니다 [어제 들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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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산책을 한다.
그래서인지 산책하며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산책용 플레이리스트도 열심히 만들게 되었다.
제법 쿨한 플레이리스트도 있고(1990년대 여성 보컬 알앤비 중심) 제법 힙한 플레이리스트도 있고(클레어오 등 요즘 음악가 중심) 걸음이 더욱 힘차지는 플레이리스트도 있다(아무로 나미에의 댄스곡 중심). 하지만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오타쿠 플레이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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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산책을 한다. 같이 사는 개 흑당이가 실외 배변만 하기 때문에 비바람이 쳐도, 폭염이 와도, 우리는 뚜벅뚜벅 산책을 한다. 전주로 이사를 오고부터 산책이 조금 더 좋아졌다. 사람이 적고, 풀밭이 많고, 길이 넓다 보니 개나 사람이나 마음이 더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산책하며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산책용 플레이리스트도 열심히 만들게 되었다.
제법 쿨한 플레이리스트도 있고(1990년대 여성 보컬 알앤비 중심) 제법 힙한 플레이리스트도 있고(클레어오 등 요즘 음악가 중심) 걸음이 더욱 힘차지는 플레이리스트도 있다(아무로 나미에의 댄스곡 중심). 하지만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오타쿠 플레이리스트’이다.
오타쿠 음악이라 하면 정의가 까다롭고 범위 또한 넓기에 일단 이 글에서는 ‘애니메이션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를 오타쿠 음악이라 하겠다. 많은 명곡 중 이 신성한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가는 기준은 ‘뻐렁치는가’이다. 뻐렁치다의 어원에 대해 있어 보이는 설명을 하고 싶어 찾아보니 배우 이광기씨가 2003년 KBS 예능 프로그램 〈쟁반 노래방〉에서 만든 신조어라고 한다. 다른 단어로 대체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뻐렁치다만 한 단어가 없다. 웅장하다, 감동적이다, 울컥한다, 끓어오른다 등의 뜻을 모두 품고 있는 굉장한 단어!

여튼 그런 ‘뻐렁’ 부문 이번 달 1위 곡은 ‘나답게’이다. 이 곡은 〈기동전함 나데시코〉라는 1990년대 애니메이션의 엔딩곡이었고 노래의 화자는 함장 유리카, 스무 살 여성이다. 작품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할 마음은 없다. 나도 끝까지 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하지만 이 낭창한 느낌의 노래가 좋아서 20년 넘게 듣고 있다.
이 곡의 대단함은 툭 던지는 가사의 파괴력과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 낙천적인 곡조가 만나는 부분에서 생긴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1절 후렴 ‘가끔은 더욱 나답게 바람을 느끼고 싶어. 태양도 소나기도 전부 받아들일 테니까.’ 울컥. 2절 후렴은 심지어 이렇게 바뀐다. ‘별하늘도 어둠도 똑바로 바라볼 테니까.’ 이걸 갓 함장이 된 스무 살 아가씨가 부른다고 생각을 하면 또 울컥. 얼마 전에는 걷다가 이 부분에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둠을 똑바로 바라본다잖아, 너무 강한 마음이잖아, 그렇지 흑당아? 흐어엉. 흑당이는 어리둥절.
오타쿠 음악과 비오타쿠 음악에 대해 생각해보면, 가장 큰 차이는 ‘검열’에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하면 좀 그렇지 않아···?’ 같은 망설임이 없다. 오타쿠 음악에는 오직 몰입과 상승과 직진뿐이다. 좌우지간 곧게 세상 끝까지 달려간다. 어두운 사람은 어두운 감정으로 곧게 달려간다. 애매함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런 세계관의 쾌감이 있다. 많은 지구인이 명곡이라 하는 ‘플라티나’라는 노래가 있는데(〈카드캡터 체리〉의 일본판 주제가) 나는 얼마 전에야 이 노래가 굉장하다는 걸 알았다. 간노 요코라는 걸출한 음악인이 만든 곡인데 언뜻 쉽고 달콤하게 들리지만 예사 천재성이 아니다. 나는 이런 곡을 ‘천재가 어린이들을 위해 차력으로 친 머랭 같은 노래’라고 부른다. 그 덕에 어른이 된 지도 한참 지난 내가 길을 걷다가 감동해서 울 수 있다니··· 정말 복된 일이다.
오지은 (뮤지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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