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쑥대머리’ 명창을 기리는 도로, 광주 임방울로 [도로명 속 남도역사인물]

판소리 '쑥대머리' 하나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소리꾼이 있다. 송정 출신의 명창 임방울이 그다. 그 명창 임방울을 기리는 도로가 '임방울로'다.
2009년 개통된 임방울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상무교차로(우산동 709-1)와 북구 양산동 양산 택지지구(용두동 산 54-10) 교차로를 연결하는 도로로, 총길이는 10,631m이고, 폭은 8~10차선의 대로(大路)다.
임방울대로는 수완지구와 첨단지구를 경유하는데, 주요 교차도로로는 무진대로, 하남대로, 북문대로, 호남고속도로, 빛고을대로, 하서로 등이 있다.
임방울대로는 최근에 대규모로 조성된 수완지구와 이전에 개발된 첨단지구를 지나며, 대부분 아파트 밀집 지역이어서 교통량이 많다. 임방울대로는 상무교차로에서 끝나는데, 이후에 무진대로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 구간에서 극심한 정체가 발생한다.
#'쑥대머리'로 스타가 되다
1929년, 스물다섯의 시골뜨기 총각이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조선 명창 연주회에서 쑥대머리 한 대목을 부른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 찬자리에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이 노래는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난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 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시작된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뿜는 통성에 쉰 듯 칼칼하게 터져 나오는 수리성(쉰 목소리처럼 껄껄하게 내는 목소리)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하고 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사로잡는다. 독특한 더늠에 전라도 사투리를 마음대로 구사하는 그 구수함이며, 애간장을 녹이는 듯 끈질기면서도 애절한 목소리에 모두 도취되어 버린 것이다. 무대로 방석과 모자, 버선짝이 날아오면서 청중들은 앵콜을 외친다. 그는 삼창까지 한 후에야 겨우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쑥대머리는 시골뜨기를 일약 민중들의 아이돌, 즉 스타로 만든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오르고, 이후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제작한 쑥대머리와 호남가 음반은 120만 장이나 팔린다. 당시로서는 믿을 수 없는 대단한 기록이었다.
쑥대머리를 불러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된 시골뜨기, 그가 서편제의 최고봉, 국악계의 큰 별로 불린 광주 출신의 임방울(1904~1961)이다. 그는 1904년 전남 광주군 송정면 수성 마을(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에서 빈농이던 경학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다. 그의 집안은 세습 소리꾼 집안이었다. 본명은 승근인데, 예명인 방울은 어려서 울지 않고 방울방울 잘 논다고 해서 붙여졌다고도 하고, 젊은 날 어느 선생이 승근의 소리를 듣고 "너야말로 은방울이다"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어릴 때 외삼촌 국창 김창환에게서 기초를 닦았고, 14살이던 1916년 박재실 명창에게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운다. 소리꾼으로서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다음 동편제의 명창 유성준을 찾아 수궁가·적벽가를 배운다.
그가 당대 명창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그의 노력도 한몫했지만, 천부적으로 명창의 피를 이어 받아서이기도 했다. 당시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김창환은 그의 외삼촌이었고, 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이날치는 이종 사촌이었다.
#김산호주와 사랑에 빠지다
임방울이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송학원이란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 김산호주를 만난다. 송학원의 주인 김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년 시절 고용살이했던 부잣집 딸이었다. 동갑내기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 후 소녀는 부잣집에 시집갔고 결혼 생활이 실패로 끝나자, 광주에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린다. 이름마저 김산호주로 바꾼 그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된다.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둘은, 2년간 송학원에 숨어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2년간의 밀월은 임방울에게 대가를 요구했다. 소리가 제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크게 놀란 임방울은 산호주 몰래 집을 나와 지리산 토굴에 들어가 소리 공부에 매진한다. 수소문 끝에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그를 찾아와 다시 만나줄 것을 간청했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깊은 절망에 빠진 산호주는 그리움에 병이 깊어 30세도 안 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뜬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연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 그렇게 '추억(죽은 처를 생각함)'이 탄생한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아 어디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이 노래에 얽힌 비극적인 사랑은 오히려 감동이다. 이 둘의 사랑은 판소리계 최고의 로멘틱 사건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울 광장 노제 때 안숙선 명창이 추억을 또 불러 많은 사람을 울린다.

임방울은 잦은 공연으로 급속하게 몸이 쇠약해지지만 공연을 그치지 않는다. 1959년 7월 조선일보 후원으로 임방울 국창 독창회가 추진되자 동료와 후배들이 좀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라고 충고한다. 그러자 임방울은 "소리하는 사람이 소리를 안 하면 죽은 목숨인 거여! 그래 나보고 산송장이 되란 말여! 소리를 하다가 콱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소리를 계속 헐 테여!" 라며 되레 나무랐다고 한다.
결국 쉼 없는 공연으로 전북 김제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다. 그길로 서울 초동집으로 옮겼으나 6개월 후인 1961년 3월, 56세로 세상을 뜬다. 뇌졸중이었다.
그의 장례는 한국 국악 사상 최초로 국악 예술인장으로 치러진다. 그의 장례식 날 2백여 명의 여류 명창과 기생들이 소복을 입고 상여를 멘다. 명창 김소희의 목멘 조가 속에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힐 때, 그가 가지고 간 것은 어린 딸이 관 속에 넣어준 음반 한 장이 전부였다.
그가 죽자 미국인 알란 헤이만 씨는 '국보를 잃은 큰 손실'이라는 제목하에 "임방울의 죽음은 한국에게만 슬픈 손실이 아닌 전 세계의 크나큰 손실이며, 그와 더불어 한국 문화의 위대한 일부도 갔다" 라고 쓴다.

#임방울의 외삼촌, 국창 김창환
국창 김창환(1865~1939)은 송만갑·이동백 등과 더불어 근대 판소리 5명창으로 불리는데, 항상 그가 먼저 불린다. 이는 그가 5명창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으며 원각사 공연단의 수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김창환이 어떤 분인지는 판소리 공부의 필독서인 조선창극사를 쓴 정노식의 다음 평가만으로도 충분하다.
"조선시대 고종·순종 연간에 있어 이날치 이후로 서파(서편제) 법통을 독봉하다시피 일세를 진동한 명창이다. 제작도 능하거니와 제스처가 창보다 더욱 능하다. 잘난 풍채로 우왕좌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미묘치 아니한 것이 없다.

정노식의 평가대로 국창 김창환은 당대 서편제의 계보를 이은 최고의 국창이었다. 그 김창환이 광산구 도산동 출생으로 임방울의 외삼촌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린 시절 임방울은 국창 김창환에게 기초를 닦았고, 상경하여 쑥대머리를 불러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오늘 임방울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국창 김창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김창환은 송만갑·이동백 등 당대의 5명창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서편제의 퇴조와 더불어 그의 소리가 제자들에게 제대로 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취입한 음반 가운데 흥보가 중 중타령과 제비노정기만이 남아 그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광산구 삼도동 대야 마을 입구의 도로변에 세워진 이끼 낀 국창 김창환 기념비가 더 쓸쓸하게 보이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