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지탱해 준 친구, 독서회 [독서일기]

장정일 2025. 7. 12.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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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나의 30년 친구, 독서회〉
무카이 가즈미 지음 한정림 옮김
정은문고 펴냄
ⓒ이지영 그림

번역가로서 많은 책을 출간해왔지만, 내 이름으로 나온 책은 없었다. 내가 책을 낸다면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나의 부모는 늘 다퉜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부모님은 식사 중이든 차 안이든 서로에게 욕을 하거나 자식에게 상대방 험담을 늘어놓았고, 싸우지 않을 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환경은 아이에게 지옥이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 책에 빠져들었다. 그 후 책은 나에게 현실도피 수단이었고 인간 심리를 가르쳐주는 학교였으며 괴로운 마음을 승화하는 장이었다. 홀로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드는 시간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당시 나의 독서란 오로지 나의 깊은 내면으로 향해 있었다.

나는 대학생 때 비구니나 수녀 같은 수행자를 강렬히 동경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거의 찾지 못했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 서툴렀다. 내면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친구를 사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철학이나 종교에만 관심을 가졌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캠퍼스에 신흥종교를 권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테니스에 열중하거나 스포츠카를 타는 학생이 대부분인 가운데 종교에 경도된 사람들은 오히려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에, 한발 삐끗했다면 나도 그런 종교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훗날 사라 베이크웰의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사르트르와 하이데거, 그리고 그들 옆 실존주의자들의 이야기〉를 애써 번역하게 된 것도 그런 진지함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란 건 신흥종교였을까. 과연 그들은 정말 종교가 필요했던 것일까. 어쩌면 들떠 있던 시대를 거스르며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자리를 원했던 게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가까운 곳에 독서회가 있었다면 어느 정도 구원받지 않았을까. 내면에 있는 우울한 생각을 언어화하고 토해낼 자리가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필요했다.”

함께 책 읽는 사람들의 모임인 독서회(북클럽)가 있는 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20대 후반까지 책은 혼자 읽고 상념에 잠기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 밖에 책 읽는 다른 법은 몰랐다. 나는 번역가가 되기 위해 번역을 공부하면서 책을 꼼꼼히 해부하며 읽는 법을 알게 되었고, 몇 년 후에는 “깊고 넓은 또 다른 독서법을 알게 되면서 내 앞에 큰 길이 열렸다”. 나를 독서회로 이끈 사람은 번역가 양성 모임을 주관하던 스승이자 선배 번역가인 A 선생이었다. 1987년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대하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을 읽는 것으로 출발한 이 모임에 나는 1993년부터 참가했다. 독서회의 중요 회원이었던 A 선생은 2014년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났으나, 이 모임은 지금까지 35년째 이어지고 있다.

“문학을 말하는 건 삶을 말하는 것”

독서회의 형식은 다양하다. 우리 독서회는 모두가 같은 책을 읽고 한 달에 한 번 같은 장소에 모여 차를 마시며 두 시간가량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회원은 열 명 정도를 유지해왔고, 매달 일고여덟 명이 참가한다. 한때는 20대에서 80대까지 모든 연령층이 있었지만 점차 고령화가 진행돼 현재는 40대부터 80대까지다. 어쩌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기도 했으나, 35년 동안 읽은 180개 작품은 대부분 프랑스 문학을 중심으로 한 외국 문학이다. 2021년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2023년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었는데, 모두 처음 읽는 아프리카와 한국 소설이었다.

모임에 반드시 표어나 신조 따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독서회에는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문학을 매개로 하면 삶의 어떤 화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자기 안에 조금씩 존재하고, 아무리 오래된 이야기일지라도 등장인물의 미묘한 심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편성이 있기에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케루〉가 그 달의 선정 도서였을 때, 남편을 독살하려 했던 여주인공의 심리를 놓고 분방한 의견이 쏟아졌다. 나는 ‘테레즈는 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레즈에게 결혼이 도피였던 것처럼, 나에게도 결혼은 도피였을지 모른다. 어쨌든 친정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남편은 문학에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책 읽는 모습을 결혼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책뿐만이 아니라 음악에도 미술에도 여행에도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아내한테도 관심이 없었다. 부부 대화 따위는 거의 없었다. 인생의 기쁨도 고통도 함께 맛보리라고 기대했다. 그것이 나의 이상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상대에게 기대하는 일을 일체 그만두었다.”(그런 사람인 줄 모르고 결혼했던 당신 책임 아닌가?)

나에게 유일한 위안은 독서회였다. 내면을 향하던 생각을 밖으로 표출할 자리가 없었다면 진즉에 폭발했지 싶다. 테레즈에게 필요한 것도 자기 생각을 밖으로 내뱉는 일이며 ‘영혼이 교류하는 장’으로서의 독서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아온 것은 책이 있었기 때문이고 독서회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독서회는 일상생활에서는 말하지 않는 주제도 문학을 통해서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 괴로운 일이 생겨 우울할 때 글로 써보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처럼, 독서회에서 자기 생각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나면 돌아오는 길에 신기하게도 기분이 좋아진다.

최근에는 고전이나 명작이 모두 만화나 오디오 북으로 변신 중이다. 이런 변신은 더욱 쉽게 책을 혼자서 대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독서회 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자주 본다. 장정일씨가 내 책을 읽고 짚어준 독서회의 존재 의미(자신을 언어화할 계기)에 독서회 장점을 한 가지 더한다면, 무엇보다도 혼자서는 손이 가지 않을 책이나 포기할 법한 책도 어느샌가 읽어낸다는 점이다. 혼자라면 도중에 던져버렸을지 모를 책도 정해진 기간 동안, 또 나와 함께 이 책을 읽는 동료가 있다고 생각하면 읽기 힘든 페이지가 의외로 잘 넘어간다. 여럿이서 하는 토론은 한 번 읽은 책을 여러 번 읽은 듯이 만들어준다. 만약 당신이 독서회를 만들 생각이라면, 적당한 인원수에서부터 토론의 예절에 이르기까지, 35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나의 독서회에서 나온 세세한 경험을 적은 이 책에서 꼭 필요한 사항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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