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민주화의 길을 닦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 2025. 7. 12. 06:1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10주기 세미나 발제문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

박정희 대통령이 압축 성장으로 산업화를 성공시킨데 이어 김영삼 대통령이 단축성장을 통해 민주화를 완성했다. 이로써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룩한 세계 유일의 나라(후진국)가 되었다.

일찍부터 카메라에 익숙한 정치가로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부각되었던 YS는 전국에서 고른 지지를 받는 비폭력주의의 의회주의자로 온건중도노선이었다. 그는 동시에 담력, 순발력, 과단성, 배짱 등 난세(亂世)에 강한 기질도 겸비한 강온(强穩)의 리더십 소유자였다. YS는 뛰어난 정치력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반독재 투쟁에 쏟아 부었고 끝내는 3당 통합을 이루며 민주정권을 창출했다. 3당 통합은 단축성장의 핵심단계가 되었다. 집권 후 군부독재시대를 청산하는데 성공, 민주화를 달성했고, 그 바통은 경쟁자이자 협력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넘겨졌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전후로 나뉘어 민주화를 완성한 셈이 되었다.

1954년 26세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YS는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4사5입 개헌안이 변칙 통과되자 소속 자유당을 탈당, 야당에 입당했다. 민주당에서 YS는 최고위원인 조병옥 박사에게서 큰 정치를, 중진인 윤보선과 유진산으로부터 선명투쟁노선과 정치기술을 각각 배웠다. 웅변에 능했던 YS는 강도 높은 발언을 하는 소장파로 두각을 나타내며, 전통야당의 적통(嫡統)으로 성장했다.

1965년 37세 나이로 민중당의 원내총무로 선출(의정사상 최연소)되었고, 이어 다섯 번이나 연이어 총무로 선출돼 부동(不動)의 총무로 명성을 얻었다. 1969년11월 42세가 된 YS는 총무직을 사퇴하고 야당의 대통령령후보로 나서겠다면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당시 박정희가 산업화에 성공하고 있는 데에 반해 야당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노쇠해 가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김대중, 후반의 이철승이 등판해 3파전을 벌이게 되었다. 모두가 범주류의 적통인 YS의 압승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이철승의 표를 챙긴 김대중의 역전승이었다. 탁월한 선동연설가인 DJ는 대통령선거전에서 박정희를 초긴장상태로 밀어 부쳤고 박정희가 가장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YS는 뒷전으로 밀려야 했다.

박정희는 3선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지 1년만인 1972년10월17일 느닷없이 유신(維新)체제를 선언했다. 중화학공업까지 완성하려면 장기간의 강력한 체제를 유지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5.16때부터의 지론이었다는데, 11년 만에 제2의 쿠데타로 현실화된 것이다. 유신 선포당시 해외여행 중이던 YS는 급거 귀국했으나 , 일본에 있던 DJ는 귀국하지 않고 반한활동을 펴고 있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도쿄에서 납치돼 서울로 옮겨졌다.

허를 찔린 야권은 1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박정희 체제에 유화(宥和)적이던 유진산 총재가 병사한 뒤 소수파로 전락했던 YS가 재기한다. 선명노선을 앞세운 YS는 후임총재경선에서 중앙정보부의 지원을 받던 상대후보를 물리치고 46세 나이에 야당총재가 되었다.

YS는 더욱 강력해진 박정희와 싸우기 위해 자신의 리더십도 강화했다. 비주류들에게 고루 안배하던 당의 요직을 상도동계들에게 나눠주었다. 강(强)대강 전략이었다. “유신철폐” “중앙정보부 해체“ 등 박 정권의 급소를 맹공(猛攻)했다.

그러나 캄보디아, 베트남 등 동남아 나라가 잇달아 공산화되는 도미노사태가 박정희를 구해주었다. 한반도 위기설까지 등장하자 박정희는 야당에게 정치휴전을 제의했고, 여.야영수회담까지 열리게 되었다. 안보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YS는 투쟁강도를 조절했다. YS의 독주가 불만이던 비주류가 YS가 정치자금을 받고 선명노선을 포기했다는 등 근거 없는 주장을 펴며 총공세로 나왔고, 진지한 대화를 나눴던 박정희도 시치미를 떼고 YS를 협공했다. YS는 사면초가의 처지가 되었다.

76년 전당대회에서 비주류가 동원한 폭력배들의 난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YS는 비주류연합에게 당권을 넘겨 주어야했다. 중도통합론 주창자인 연합대표 이철승은 이제 여.야가 싸우지 않고 상호보완보충 하는 상생정치로 간다고 했다. 중도통합론이 사꾸라 논리라는 유행어가 시중에 나돌기 시작했다.

3년 뒤인 79년 5월 다시 전당대회가 열리고 YS는 리턴매치에 나섰다. 박 정권의 전천후 탄압으로 YS계보는 크게 위축돼 지지의원이 4명밖에 안 돼는 초라 한 소계보가 되어 있었다. 가택 연금 중이던 DJ가 감시망을 피해 YS캠프를 찾아와 공개지지를 선언하는 열띤 연설을 했다. 소속 동교동계 인사와 부동층에게 영향이 컸다. YS캠프는 눈에 띄게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1차 투표에서는 이철승이 1위였으나, 2차 결선에서 3위인 이기택(92표)이 YS지지로 돌아서는 바람에 YS가 11표 차로 이철승을 누르고 당권을 되찾아왔다. 유신 정권의 운명을 바꿀 역사적인 역전(逆轉)이었다.

79년8월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인 YH여공 2백여 명이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여- 2 공 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다치는 YH여공사건이 발생했다. 신민당이 강제 진압을 규탄하며 강경노선으로 나가자 박 정권은 「신민당 총재단의 직 무집행가처분」을 받아내 YS의 총재 직무를 정지시키는 정치공작을 폈다. YS는 “박 정권을 타도하자”고 공식선언했다. 처음으로 하는 초강경 발언이었다. 박 정권은 YS의 미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기사를 용공(容共)적 이적(利敵)행위라고 공격하며 YS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변칙 처리를 통해 가결했다.

18년 장기집권의 박 정권은 당시 3개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첫째는 고도경제성장이 그간에 생긴 후유증 때문에 한계에 부딪쳐 경제위기를 가져오고 있었다. 구조개혁의 결단이 절실했다. 두 번째는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간에 심각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는 그 권력투쟁을 조정해야할 대통령이 정치적 평형감각을 잃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국가 지도력의 위기였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YS와 관련된 민란인 부마사태까지 당했던 것이다.

YS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의한 군사독재에 대하여는 목숨을 투쟁했지만, 박정희의 산업화가 공산주의통제경제체제를 취하지 않고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추진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에는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수출진흥, 중화학공업화 등에 대해서는 반대의사를 표명한 일이 없으며, 민간기업의 경영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지나친 규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지만, 그것이 공산주의식 통제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김영삼은 박정희가 죽은 뒤 당연히 민주화정권이 권력을 잡고 국가적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흘렀다. 정치장교들인 신군부가 군부독재를 연장시키는 쿠데타(12.12)를 일으켰던 것이다.

◇논평: 민주화의 초석을 놓은 김영삼 대통령/이철순 부산대 교수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오인환 전 장관님께서 YS가 1954년 정계에 입문한 시기부터 1979년까지의 정치활동을 간결하게 잘 정리해 주셨다. 발표문에 깊이 공감하면서 YS가 한국 민주화의 초석을 놓았다는 관점에서 몇 가지 보완하고자 한다.

첫째, YS는 1954년 자유당정권이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종신 임기를 보장하는 2차개헌(소위 사사오입 개헌)을 시도할 때 26세의 초선의원으로서 정면으로 맞섰다. 사사오입이라는 중대한 절차적 하자에 분개하여 여당인 자유당을 탈당하고 가시밭길의 야당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YS의 민주화투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YS는 1961년 5.16쿠데타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유린했다고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는 김종필의 공화당 창당 참여 권유를 거절하고, 1963년에는 군정세력의 군정연장에 저항하는 “백조그릴 사건”으로 22일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YS는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 되었다.

셋째, YS는 박정희정권의 1969년 3선개헌 시도에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는 본회의 발언에서 3선개헌은 제2의 쿠데타라고 단언했고, 이에 중앙정보부의 협박이 잇달았다. 급기야 목숨을 앗아갈 뻔한 초산테러 사건을 겪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과감하게 테러의 배후를 규명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대단한 용기와 담력의 정치인이었다.

넷째, 1972년 유신이 선포되었을 당시 미국에 있던 YS는 주저하지 않고 국민들과 함께 하겠다는 심정으로 즉시 귀국했다. YS는 1974년 선명노선을 내세워 최연소 야당총재가 된 이후 개헌투쟁을 주도했다. 1976년 잠시 당권을 빼앗겼으나 1979년 갖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다시 총재에 복귀한 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YS는 유신체제 타도 투쟁을 벌이다 급기야 의원직을 잃었고, 이것이 부마항쟁을 촉발시켰고 이후 유신체제는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YS는 한국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과감하게 투쟁에 나섰다. 그는 한국 민주화의 초석을 놓은 정치인으로서 ‘민주화대통령 김영삼’으로 불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