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같은 ‘유교걸’ 심청…원초적 창극에 오페라 한 스푼
[비욘드 스테이지] 창극 도전하는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

이번엔 피칠갑을 한 심청을 데려온다. 전주세계소리축제와 국립극장이 공동제작하는 판소리씨어터 ‘심청’ 얘기다. 7일 국립창극단 리허설 현장은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심청과도 달랐다. 질펀한 성적 풍자가 등장하는 방앗간 장면이 한창이다. 심봉사 역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차례로 드러눕고, 아낙네가 바지를 벗기는 동안 라이브 카메라가 디테일한 표정까지 스크린에 전달한다.
어린 시절 유럽에 정착해 판소리를 경험해본 적도 없었지만, 심청가 눈대목 ‘범피중류’를 듣는 순간 빠져들었다고 했다. “처음 듣는데 낯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속의 무의식들이 반응하는 느낌이었어요. 인간의 목소리로 이런 표현이 가능하구나 싶고,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더군요. 오페라는 정제된 악보에 표현을 입혀서 감정과 생각을 드러낸다면, 판소리는 발성부터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잖아요. 속에서 겹겹이 쌓인 사연들을 쏟아내는 그 무한대적인 스토리텔링도 너무 멋지고요.”
![심청의 옷을 불태우는 이미지가 인상적인 ‘심청’ 포스터. [사진 국립극장]](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7/12/joongangsunday/20250712001607685xufc.jpg)
3년 전 심청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1년여 리서치 끝에 대본을 썼다. 지문에 ‘무도곡 풍으로’ ‘스케르쪼 곡을 넣으라’는 식으로 관현악 연주를 꼼꼼히 지시해 놓은 걸 보니 흔한 창극은 아니다. ‘어린 소녀가 아버지를 위해 몸을 파는 이야기’라는 뼈대는 있지만 용궁 판타지나 궁궐 로맨스도 없고, 시대와 장소를 특정할 수도 없다. 심청이 피를 흘리지만, 결말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도 아리송하다. “스포일러는 금물이지만, 내가 믿는 건 ‘여주인공을 많이 괴롭힐수록 관객이 행복해 한다’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말이에요. 그래서 오페라에서도 여주인공을 괴롭히죠. 약자들이 희생되면서 우리가 반걸음씩 나아갔다는 얘기를 하고 싶으니까요. 심봉사 뿐 아니라 만자 맹인들이 눈을 뜨잖아요. 심청이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탐욕에 눈 먼 인간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거죠. 잔치에 맹인 3000명이 모여 꿈적꿈적 눈을 뜨는 게 결코 익살스런 장면이 아니에요. 거기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죠.”
요나 김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바그너 오페라를 9개 프로덕션이나 거친 ‘바그너 전문가’다. 본고장에서 현지인들도 어려워하는 바그너 사랑엔 이유가 있다. “가사가 복잡하고 감정보다 생각을 풀어내는 바그너 오페라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해서 지적 만족도가 높아요. 베르디나 푸치니는 박자로 발걸음까지 정해져 있어서 연출이 할 일이 별로 없지만, 바그너는 방목형이라 재해석 공간이 훨씬 넓죠. 심청은 바그너보다 더해요. 판본도 여러 개고 노래 스타일도 다 다르니까 너무 자유롭고 신나죠. 오케스트라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없길래 3중창, 6중창 같은 ‘떼창’을 많이 넣어서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어요. 여러 실험을 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장르를 만드는 중입니다.”
까칠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호방한 성격인 그는 스케일도 남다르다. 어린 시절 책과 영화에 빠져 살다 다른 세계를 찾아 오스트리아로 향했고, 지금도 빈과 하이델베르크를 오가며 살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했을 뿐 음악이나 드라마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오페라를 놓치지 않았다. “학생 때 극장이 좋아서 아예 표 끊어주는 알바를 했어요. 극장에 살다시피 했으니 저절로 공부가 됐죠. 장르가 규정되지 않는 로버트 윌슨 같은 사람들 전성기 무대를 원 없이 본 것 같아요. 극장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아는 척을 좀 했는데(웃음), 어느 날 극장장이 모차르트 오페라 ‘자이데’ 연출가가 아프다며 급하게 대타를 구하더군요. 무대 디자이너 친구가 저를 강력 추천했고, 망설이는 저에게 도와주겠다며 용기를 줬어요.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길래 극장장에게 뻔뻔하게 ‘내 다음 작품은 뭐냐’고 물었죠.”
‘다음 작품’은 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을 극화한 연극이었다. 처음 각색을 해보며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을 받았고, 이후론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작품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오페라 연출을 운으로 하는 건 아니다. “연주는 개인의 기량만 있으면 되지만 연출은 장르가 달라요. 언어는 물론 그 사회에 대한 인사이트가 있어야 하고, 국적이 10개쯤 되는 프로덕션을 통솔해야 하죠. 뭘 몰라서 용기가 있었는데, 옛날 생각도 나네요. ‘라 트라비아타’ 때 조연이 나를 인턴으로 알고 커피 심부름을 시킨 적도 있어요. 동양인 여성에 대한 편견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지만, 편견 자체가 바보 같지 않나요. 속으로 ‘이놈들’ 하고 내 길을 갈 뿐이에요. 나는 연출가고, 이 작품을 잘할 수 있느냐가 문제죠.”
‘심청’ 다음엔 한국판 링 사이클을 만들고 싶은 꿈도 꾼다. “링은 일본, 중국도 했거든요. 게르만 신화가 원형이지만, 아르헨티나에서 피노체트 정권 탈취로 풀어낸 것처럼 한국 근현대사에 대입할 수도 있는 게 링이에요. 클래식 기량이 이렇게 좋으면서 링을 안 한 나라는 한국 뿐인데, 왠지 내가 해야 될 것 같아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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