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하수구 탄광촌

배현정 2025. 7. 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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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정 경제선임기자
지난달 정부의 고강도 대출 규제가 발표되자, 부동산 커뮤니티에선 ‘하수구 탄광촌’이라는 신조어가 퍼졌다. 하남·수지·구(舊)성남·동탄·광명·평촌 등 서울 인접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강남 3구와 용산·마포·성동 등 고가주택 수요가 대출 제한으로 위축되자, 개발 기대와 실수요가 겹친 이들 지역이 대안으로 떠올랐다는 해석이 나온다.

시장 흐름이 아직 뚜렷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부 지역에선 수요 이동의 조짐이 감지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7월 첫째 주 서울 아파트값은 전주보다 오름폭이 둔화했다. 반면 서울 외곽의 금천(0.09%)·관악(0.19%)·구로(0.18%) 등 ‘금관구’는 상승폭이 커졌고, 하남(0.11%)·수지(0.16%)·동탄(0.02%)·광명(0.22%)과 안양 동안구(0.30%) 등 ‘하수구 탄광촌’ 주요 지역들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성남 수정구는 0.35% 올라 상승폭을 더욱 키웠다. 고가 억제 → 중저가 확산이라는 흐름이 통계에서도 일부 엿보이고 있다.

「 대출 규제가 만든 수요의 ‘유예’
불안에 쫓긴 시장, 신뢰 회복 관건

부동산 인플루언서인 ‘리틀백’은 “6·27 대출 규제 이후 많은 이들이 매수를 완전히 포기하기보다는, 더 나은 조건과 타이밍을 기다리며 조용히 시장을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매일 운영하는 ‘커피챗’을 통해 실시간으로 급매 매물과 시장 흐름을 전하며, 규제 이후 오히려 구독자와 문의가 늘었다고 했다. 수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유예된 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달 27일 정부는 수도권 주택담보대출(주담대) 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하는 강도 높은 대출 규제를 발표했다. 다주택자의 대출은 사실상 전면 차단됐고, 분양잔금 목적의 전세대출도 막혔다. 정부는 ‘빚내서 집 사기’ 흐름을 차단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후 전반적인 수요는 주춤해졌지만, 시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표면의 움직임은 잦아들었지만, 저변의 수요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이는 단순한 규제 회피가 아니다. ‘지금 사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잃는다’는 벼락거지 공포가 여전히 작동 중이다. 바닥에 깔린 미세한 진동처럼, 기다릴 수 없다는 불안이 시장을 조용히 흔든다.

정책의 역할은 분명하다. 지금 집을 사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래야 불안에 쫓긴 투기적 수요와 왜곡된 선택이 멈춘다. 이재명 대통령은 “부동산에만 쏠린 투자가 주거 불안을 키운다”고 진단했고,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자본을 금융시장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관건은 신뢰 가능한 대안을 증명하는 일이다. 최근 증시 흐름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증권이 최근 내놓은 ‘부동산을 뛰어넘는 한국 주식’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6월 20일까지 서울 아파트는 연 5.52% 올랐지만, 코스피는 같은 기간 연 29% 이상 급등했다. 지난 10년간 서울 아파트 수익률(연 10.15%)이 코스피(연 5.98%)를 앞서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 주택이 아니어도 자산을 키울 수 있다는 경험을 사회가 공유해야 한다. 동시에 중장기적인 주택 공급과 임대차 시장의 안정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국내 가계 자산의 75% 이상이 부동산에 몰려 있고, 금융자산은 25%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동산으로의 쏠림은 부채를 늘리고 소비를 움츠리며, 경기 대응을 위한 금리 정책에도 족쇄를 채운다.

‘하수구 탄광촌’으로 향하는 수요는 단순한 시장 반응이 아니다. 이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좁아졌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적 경고일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건 방향만 바꾸는 규제가 아니라, 불안 없이 기다릴 수 있는 환경이다. 주택을 투기의 종착지가 아닌 삶의 기반으로 되돌려야 한다.

배현정 경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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