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바다도, 고흐의 별도 … 시작은 종이노트
창조성 깨우는 최고의 도구
명암 표현 등 새 회화 기법
스케치북 습작 통해 개발
회계 탄생시킨 손익계산도
13세기 상인들 노트서 시작

몰스킨(Moleskine) 노트의 단순한 검정색 표지는 처음에 언뜻 보면 가죽인가 싶을 정도로 탄탄하면서도 고급스럽다. 익숙한 A5 용지보다 폭이 2㎝가량 좁은, 표준적이지 않은 크기여서 재킷 주머니에 쏙 집어넣을 수 있다. 둥근 모서리, 고무줄 잠금장치, 봉투 형태의 내부 주머니까지 한데 어우러져 당신의 아이디어가 응당 최고의 대접을 받을 만하다는 느낌을 풍긴다.
디자이너, 기자, 작가, 화가 등 창조적인 직군의 사람들은 모두 노트를 갖고 있다. 몰스킨 역시 과거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사용했던 전설적인 노트를 복원했다는 콘셉트다. 광고 문구로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브루스 채트윈의 전설적인 노트를 소생시켰다"고 내세운다.
1997년에 몰스킨을 공동창업한 마리아 세브레곤디는 인터뷰에서 "몰스킨은 무엇보다 창조성의 조력자"라고 줄곧 강조한다.
영국의 출판인이자 종이 문화사 전문가인 저자는 노트의 가장 큰 매력으로 형식적 제약을 창조성의 자극제로 활용할 수 있는 점을 꼽았다. 노트의 단순한 형태가 그것을 창조적 도구로 만들어준다는 얘기다. 데이비드 색스의 책 '아날로그의 반격'에서는 종이 노트가 디지털 대체품에 대한 정신적 저항력을 서서히 키운다고 표현했다. 말하자면 노트는 사소한 것에서 탄생한 비범한 가능성이라는 감각을 주는 단순한 물건인 셈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다양한 노트를 소개한다. 현대인의 눈에 노트처럼 보일 법한 가장 오래된 물품은 기원전 1305년 지중해 밑바닥에 있던 울루부룬 난파선에서 발견됐다. 또 근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한 회계와 관련한 개념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파롤피 원장은 1299년 프로방스에서 작성됐다. 파롤피 원장은 피렌체 상인들 회사의 거래 원장으로 현존하는 최초의 복식부기, 손익계산 사례로 여겨진다.
화가들의 노트, 즉 스케치북의 시작을 알아보려면 두 화가 치마부에와 그의 제자, 조토 디 본도네를 살펴봐야 한다. 13세기 말 두 이탈리아의 화가에 의해 극적인 일이 벌어졌고 이후 그림이 그려지는 방식, 그림을 보는 방식이 바뀌었다. 1240년 시골 귀족 출신으로 태어난 치마부에는 어린 나이부터 그림에 푹 빠졌다. 그는 운 좋게도 기독교 유럽에서 최초로 젊은 예술가가 그림을 그릴 종이를 구할 수 있었던 1250년대에 성장했다. 그는 장부나 다른 종이에 사람, 말, 집과 그 밖에 온갖 상상의 것들을 그리면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치마부에가 그린 현존하는 성모화를 보면 기존의 밋밋하고 상징적인 모습이 아니다. 명암법을 써서 성모마리아의 턱과 양손에 형체와 생명을 부여했다. 빛과 그림자를 처리하는 명암법은 이후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화가들만의 특징적인 기법이 된다.
어린 조토는 치마부에의 작품을 보고 성장한다. 피렌체 도심에서 일하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도망 나와 치마부에의 도제로 들어갔다. 조토는 스케치북을 언제든 쓸 수 있던 덕분에 치마부에의 기술을 익혀 그 기량을 거장의 수준까지 올려놓았다.
조토가 그린 '비탄'을 보면 누구든 사실주의 화풍을 알아챌 것이다. 성모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이 그림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의 인체 비율이 잘 잡혀 있고 자세가 생생하다. 비잔틴 예술과 달리 이들의 행동은 자연스럽다. 조토는 빛과 그림자, 시점 처리로 만들어낸 깊이의 착시를 통해 관객을 그들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다.
수련 중인 화가가 새로운 기법을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소묘, 그것도 많이 그리는 것이다. 입체파 등 자신만의 기법을 만들어온 파블로 파카소 역시 노트광이다. 1973년 피카소의 사후에도 여러 습작과 예비 작업, 스케치북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한 비평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듯하다"고 발언했을 정도다. 이 노트는 피카소의 혁명적인 창작 과정과 진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박윤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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