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방' 들어서니…그리운 고향섬 닮은 풀내음이 코끝에

송경은 기자(kyungeun@mk.co.kr) 2025. 7. 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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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 韓근현대미술 100년사
작품서 영감받은 향·음악
'작가의 방' 전시공간 채워
관람 깊이와 몰입감 더해
서양·추상화·여성 소주제
족적 남긴 작가들 재조명
이건희 컬렉션 58점 포함
140여명의 작품 250점 전시
절제된 점과 선, 색면으로 한국 추상미술을 선도한 김환기 작가의 방. 국립현대미술관

방에 들어서자 풀 내음이 물씬 풍긴다. 산과 달, 바다, 나무, 구름 등 자연을 벗 삼아 자랐던 김환기(1913~1974)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향이 공간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었다.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인 기좌도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도쿄와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등을 옮겨 다니며 평생 가슴에 고향에 대한 향수를 품고 살았다. 외딴섬을 떠올리게 하는 향은 이런 마음의 풍경을 담은 김환기의 그림 속 절제된 색면과 점, 선과 어우러져 진한 공감각을 일으켰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역사와 정체성을 집중 조명하는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 Ⅰ·Ⅱ'가 최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했다. 지난 5월 먼저 문을 연 1부는 대한제국과 개화기를 거쳐 한국전쟁까지 격동하는 역사 속 태동한 한국 근현대미술을 채용신과 구본웅, 임군홍, 오지호, 박래현, 김기창, 이응노, 이중섭 등 작가 70여 명의 작품 145점을 통해 짚어본다. 이어 지난달 26일 개막한 2부에선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김환기와 박생광, 박서보, 박이소, 서세옥, 성능경, 윤형근, 안규철, 이불, 이성자, 이우환, 최욱경 등 한국 근현대미술을 이루는 작가 70여 명의 작품 110여 점을 펼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처럼 한국의 근현대미술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1972년 첫 기획전 '한국근대미술 60년전' 이후 53년 만이다. 근현대미술 부문의 주요 소장품을 펼친 이번 상설전에는 총 58점(1부 41점·2부 17점)에 달하는 '이건희 컬렉션' 작품이 포함돼 더욱 눈길을 끈다. 박래현의 '여인'(1942년), 이중섭의 '황소'(1950년대), 이성자의 '극지로 가는 길 83년 11월'(1983년), 신학철의 '한국근대사-종합'(1982~1983년) 등이 대표적이다.

마대 위에 검은 형상으로 인간의 고통·숭고를 그렸던 윤형근 작가의 방. 송경은 기자

전시는 소주제를 따라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연대기적으로 펼치되, 중간중간 특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소개하는 '작가의 방' 5개를 배치해 몰입감을 높였다. 5·6전시실에서 열리는 1부에서는 한국 근대 서양화단의 인상주의 선구자로 꼽히는 오지호, 작가 부부로 평생 예술 여정을 함께 걸었던 박래현·김기창,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이자 비운의 삶을 살았던 천재 화가 이중섭의 방을 구성했다. 3·4전시실의 2부에서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와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침묵과 절제의 회화 세계를 구축한 윤형근의 방을 선보인다.

특히 2부의 '전시 속 전시'로 마련된 두 작가의 방은 관객이 단순히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후각이나 청각을 통해 공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김환기의 방에는 천연 향기 브랜드 수토메 아포테케리와 협업해 그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특별 제작한 향기가 나도록 연출됐다. 국가문화유산 지정 작품인 초기작 '론도'(1938년)를 시작으로 파리 시기의 대표작인 '산월'(1958년), 반복되는 점과 푸른색의 화면을 통해 한국적 서정성과 여백의 미를 구현한 뉴욕 시기의 대표작 '새벽 #3'(1964~1965년) 등으로 이어진다.

윤형근의 방에는 그의 작품 세계와 공명하는 묵직한 정재일 음악감독의 사운드 스케이프 작업을 함께 펼쳤다. 윤형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유신 정권을 거치며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1973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사건은 그의 예술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왔고, 이후 그는 색채감 없이 고목처럼 마대 위에 우뚝 선 검은 형상을 그리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존재의 본질과 인간의 고통·숭고를 담아낸 '청다색'(1976~1977년), '청다색 86-29'(1986년) 등이다. 물감이 스며들고 번지고 중첩되면서 형성된 묵직한 색 띠와 여백 사이의 긴장은 정적 속에서 삶의 무게를 가늠케 하는 깊은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이우환 '점으로부터'(1973년).

작가의 방을 제외하면 1부는 '새로운 시선의 등장: 광학과 카메라, 근대적 지식체계와 미술' '근대 서화의 모색' '미술/미술가 개념의 등장' '조선의 삶을 그리다' '폐허 위에서: 한국전쟁과 조형실험' '폐허 위에서: 가족을 그리며' 등 6개 소주제로 나뉜다. 2부는 '정부 수립과 미술'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추상미술의 확산' '모더니스트 여성 미술가들' '행위, 사물, 개념: 전위미술의 실험들' '한국적 추상의 모색' '한국화의 새로운 전환' '형상의 회복과 현실의 반영' '동시대를 향하여' 등 9개 소주제로 진행된다.

이번 전시가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대중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으나 한국 미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함께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현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소장품을 시대순으로 정리하고 다시 소주제로 묶어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과 업적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일례로 1부의 '미술/미술가 개념의 등장' 섹션에서는 20세기 초 서양화가들을 두루 살펴본다. 여기에는 일본 유학을 통해 유화와 서양 미술사조를 접한 나혜석과 도상봉, 이종우 등 1세대 서양화가들의 유화 작품이 주로 걸렸다. 유학 시절 야수파의 강렬하고 대담한 표현주의에 자극을 받았던 구본웅은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아카데미즘과 인상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화풍을 구사했다. 모자를 쓰고 입에 담뱃대를 문 채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인물을 그린 그의 전시작 '친구의 초상'(1935년)은 시인 이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해부학에 기초해 나체의 인물을 그린 나상윤의 '누드'(1927년)나 이해선의 '누드'(1928년) 역시 보수적이었던 당대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면 상당히 도전적이었다.

이성자 '극지로 가는 길 83년 11월'(1983년).

한국전쟁 시기와 그 이후의 작품을 소개하는 1부의 '폐허 위에서: 한국전쟁과 조형실험' 섹션에서는 구체적인 형태를 생략한 초기 추상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한묵의 '엉겅퀴'(1958년), 이응노의 '숲'(1950년대 후반) 등이다. 한국 기하추상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한묵은 1951년 1·4후퇴 때 월남해 1957년 황염수, 유영국, 이규상, 박고석과 함께 '모던아트협회'를 창립했고, 대상을 생략하거나 변형하면서 추상미술을 탐구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던 이응노는 석방 이후 1970년대 프랑스에서 문자추상 작업을 이어갔고, 전쟁 이후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사유와 시선을 담은 추상화를 남겼다.

2부 섹션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는 광복 이후 국가 주도로 추진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최초로 추상미술이 인정받게 된 순간을 짚는다. 1961년 제10회 국전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을 수상한 김형대의 '환원B'(1961년)가 주인공이다. 이 작품의 화면에는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 있지 않고, 적갈색을 주조색으로 비정형의 붓질만 겹겹이 중첩돼 있을 뿐이다. 이 학예연구사는 "이 작품의 국전 수상은앵포르멜(1950년대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서정적 추상회화의 한 경향) 회화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인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성자, 방혜자, 최욱경, 심경자 등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외면받았던 여성 미술가들의 실험과 시도를 재조명하는 2부의 '모더니스트 여성 미술가들' 섹션도 주목된다. 이들은 자연과 생명, 감정, 기억, 내면과 같이 감각적인 주제를 추상화로 풀어냈다. 김정숙, 윤영자, 김윤신의 조각과 이신자, 박래현의 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재료와 매체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외연을 넓힌 여성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상설전이지만 계속 같은 작품이 걸려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방은 1년 주기로 교체하고, 소주제별로 전시된 작품들도 일부 교체를 통해 폭넓게 소개하겠다는 방침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57년간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소장품만 1만1800여 점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번 상설전은 우리 미술관의 지속적인 소장품 확보 활동과 작품을 기증해주신 분들의 노력이 더해져 이뤄진 전시"라고 강조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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