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최선은 그런 것일 수도 [.txt]

한겨레 2025. 7. 1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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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우울증을 앓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싶어 병원을 찾았고, 왜 왔는지 물은 의사가 두툼한 문진표를 내밀었다.

나는 '매우 그렇다'부터 '전혀 아니다'까지 다섯개 선택지 중 대부분을 '전혀 아니다' 혹은 '아니다'에 표시했고, 그런 내가 비참했다.

'아주 오래 걸렸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끝날 수 있는 일. 그럼에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 어쩌면 최선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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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gb(0, 184, 177);"><strong>송수연의 뾰족한 세계</strong></span>
김누아의 가설 l 길상효, 김정혜진, 문이소, 청예 지음, 문학동네(2025)

오래전 우울증을 앓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싶어 병원을 찾았고, 왜 왔는지 물은 의사가 두툼한 문진표를 내밀었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작성하라는 말대로 했음에도 반 시간을 훌쩍 넘겼다. 시간이 지난 후 되짚어 보니 수많은 질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었다. 조금씩 말을 바꾸지만, 문진표에서 반복된 그 질문은 ‘내일’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당신은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지리라 생각합니까?’와 같은. 나는 ‘매우 그렇다’부터 ‘전혀 아니다’까지 다섯개 선택지 중 대부분을 ‘전혀 아니다’ 혹은 ‘아니다’에 표시했고, 그런 내가 비참했다. 기대할 게 없는 삶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소설가 길상효의 단편 ‘김누아의 가설’ (문학동네청소년 2025 수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3월의 나는 12월의 나만큼이나 끔찍하다.” 주인공 누아는 전 세계 인구의 0.003퍼센트로 추정되는 ‘동면종’이다. 누군가는 “오, 나도 처자면서 꿀 빨고 싶다”라고 함부로 말하지만, 동면 후 깨어나 만나는 몸과 두뇌 상태는 누아로 하여금 자신이 “거의 확실하게 대학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늘 학기를 마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자신을 누가 알아챌까 두려워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누아에게 동면종이라는 존재 양식은 형벌이다. 누아는 ‘고칠 수도 없는 나의 증상’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일이 없는 누아는 스스로를 포기한 채 부유한다.

내일이 없어 자신을 놓은 사람들에게 내일은 어떻게 찾아올까? 나는 다행히 좋은 의사를 만났다. 중독성 없는 약도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누아도 ‘모호하고 거대한 안개 덩어리 같은 세계’ 속에서 “작지만 분명한 존재들”을 만난다. 일년을 함께 할, 그래서 누아의 사라짐을 반드시 목격할, 조별 과제의 팀원인 미노·바니·디오. 특히 미노는 껍질 속에 갇힌 누아가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미노는 누아도 잊은 어린 시절의 누아를, 그네 위에 앉아 “낙하를 앞두고 잔뜩 흥분한 얼굴로 그넷줄을 꼭 붙든” 여덟 살 누아를, 삶에 대한 기대로 충만했던 누아를, 내일을 잃은 열일곱 누아 앞에 데려다 놓는다.

나는 이 소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었다. 동면하며 침잠하는 누아에게서 십오년 전의 나를 보았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누아에게도 내일이 찾아오기를. 누아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은 미노를 통해, 자신을 향해 활짝 열린 아이들의 귀를 통해, 내일로 가는 길 위에 선다. 자신이 동면종임을 처음으로 고백한 누아의 목소리는 ‘서로 이해시키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아이들 속에서 애초의 계획과 다른 결론을 말한다. “동면 전까지 최선을 다할 거야.” 그리고 누아의 최선은 동면종에 대한 진실에 새롭게 접근하는 계기가 된다. ‘아주 오래 걸렸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끝날 수 있는 일. 그럼에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 어쩌면 최선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이 가면 당연하게 오는 내일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최선은 나와 당신의 최선과는 다르다. 미노라는 작지만 아름답고 견고한 세계는 그 차이를 읽어낸다. 책을 덮고 느릿하게 또 다른 우리의 내일을 더듬어 상상해 보았다. 우리가 미노일 내일을. 우리 청소년문학이 누군가에게 미노가 되어줄 내일을. 그리하여 그가 어제에서 걸어 나와 뚜벅뚜벅 내일로 들어가기를. ‘무엇보다 그의 손을 거친 모든 것이 그의 최선이 되기를.’

송수연 청소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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