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들의 전략적 사고,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었다[북리뷰]

2025. 7. 1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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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이론가, 제인 오스틴
마이클 S 최 지음│ 이경희 옮김│후마니타스
약자 여주인공이 성공한 비결
생존 위해 합리적 선택에 집중
오스틴, 소설에 게임이론 녹여
권력클수록 전략적 사고 부족
타인 고려하지 않아 잦은 실수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UIP코리아 제공

몇 달 전, 제인 오스틴 소설을 읽었다. 작품 배경은 여자들이 직업도, 재산도, 권력도 얻을 수 없는 세계다. 그녀의 여주인공들은 능력 있고 똑똑해도 자기 힘으로는 행복할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다. 더욱이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나 ‘설득’의 앤은 신분도 모자라고 재산도 부족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은 자기 존엄을 조금도 잃지 않은 채, ‘돈 많고 인품 좋고 말 잘 듣는 훈남’과 결혼해 해피엔딩을 움켜쥔다.

‘게임이론가, 제인 오스틴’에서 한국계 미국 학자인 마이클 S 최(최석영) UCLA대학교 교수는 오스틴 소설의 여주인공이 불리한 처지를 이겨내고 성공한 비결을 게임이론에서 찾는다. 주장은 과감하다. 저자는 오스틴이 약자인 여성들이 주변 상황을 분석하고 활용해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는 방법, 즉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품었고, 그 결과를 (논문이 아니라) 소설에 녹여냈다고 말한다. “오스틴의 소설은 게임 이론의 교과서”이다. 심지어 오스틴이 사건 진전이나 인물 성장과 별 상관없는데도, 수시로 자신이 밝혀낸 게임이론적 사고를 설파하는 구절들을 끼워 넣곤 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가령, ‘에마’에서 주인공 에마는 세련된 페어팩스가 품행 나쁜 엘튼 부인과 자주 시간을 보내는 걸 비난한다. 그러자 웨스턴 부인은 점잖게 알려준다. “페어팩스 양이 엘튼 목사관에서 즐겁게 지낸다고야 볼 수 없지. 그래도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이모는 좋은 분이지만, 항상 같이 지내기엔 대단히 피곤한 분이고. 취향을 탓하기 전에 페어팩스 양이 어떤 곳을 벗어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게임이론은 내 선택과 타인의 선택이 얽힌 세상에서, 다시 말해 ‘죄수의 딜레마’에서처럼 다른 사람의 선택이 내 선택에 미치는 영향이 클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게 최선인지를 분석한다. 이러한 선택 행위의 바탕엔 전략적 사고가 있다. 타자의 처지와 선호를 생각(위 장면에선 기회비용을 비교해 제인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하고, 편견을 버리고 내 행동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일(별 이득 없이 제인을 비난하는 대신 달리 행동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오스틴을 최초로 기회비용 개념을 밝혀낸 선구적 경제학자로 만드는 대신, 쓸데없는 장면을 소설에 써대는 이류 작가로 보이게 한다. 미국에서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격렬한 반발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건 당연하다.

주인공을 갈림길에 세우고, 어떤 행위가 최선인지를 보여준 게 오스틴만은 아니다. 저자는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미국 흑인 노예의 설화에서도 게임이론의 기미를 찾아낸다. 이 설화에서 약자인 노예는 일부러 바보처럼 행함으로써 주인의 방심을 유도해 교묘히 자기 이득을 얻는다. 약하고 불리한 존재들은 생존을 위해 거의 ‘본능적으로’ 전략적 사고를 해낸다. 그러나 오스틴은 이들과 다르다. 그녀는 선택, 선호, 전략적 사고 같은 “게임 이론의 핵심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수행하는 ‘전략적 여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이들은 감정, 본능, 습관, 사회적 관습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 선택에 집중한다. 이들이 ‘계획’이란 말을 과할 정도로 자주 쓰고, ‘통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건 그 선연한 증거다.

저자는 오스틴의 소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을 드러내고, 전략적 사고에 익숙한 이들과 전략을 모르는 ‘무개념’들을 들춰낸다. ‘오만과 편견’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처음의 편견에서 벗어나 전략적 여주인공으로 성장함으로써, 좋은 성과(다아시와 결혼하기)를 얻는다. 이처럼 작품의 여주인공들을 통해 오스틴은 약자들을 위한 전략적 사고법을 알려준다. 여성들은 자기뿐 아니라 타인의 선호와 행위까지 고려하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고 ‘의도적으로’ 이야기한다.

특히, 캐서린 부인, 월터 엘리엇, 틸니 장군 등 권력자들일수록 전략적 사고에 무능한 ‘무개념’들임을 밝혀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들은 타인의 처지를 고려할 필요가 없기에, 타인이 자신과 다른 선호와 행동을 보일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스틴은 이를 ‘오만’이라고 부른다. 초기의 다아시는 그 상징이다. 타자를 생각지 않는 오만한 이들은 좋은 결정을 내리기 힘들고, 그 때문에 자주 실수를 저지른다. 가부장제 결혼 시장에서 여성들이 최상의 삶을 얻으려면 오만한 무개념 남성들을 이끌어 전략적 사고의 협력적 동반자로 길들여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는 듯하다. 흥미롭고 재밌는 책이지만, 책을 더욱더 즐기려면 오스틴 소설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496쪽, 2만8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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