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한국 현대사다, 최인훈의 ‘세계인’ 다시 읽기 [김영민의 연재할 결심]
오늘의 한국 사회를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앞서 고민했던 한국의 명문을 다시 읽어본다. 이번 대상은 최인훈의 ‘세계인’이다.

시위란 원래 일상을 정지하는 행위, 사람들은 참다 참다 못해 일상을 멈추고 거리로 나아가 외치기 시작한다. 일상을 멈추게 만들었던 불의를 조속히 타파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외치기 시작한다. 물러나라! 타파하라! 철폐하라! 목전의 불의를 끝장내는 데 성공했을 때, 지친 심신을 이끌고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의가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면 어쩌나. 다시 일상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가야 하나. 할 수 있나. 거리로 다시 나가 불의를 타파하고 돌아올 수밖에. 그렇게 재림한 불의를 끝장내고 재차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불의가 또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면 어쩌나. 또다시 일상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가야 하나. 그렇게 고성과 시위가 끝없이 범람하다가 끝내 일상을 되찾지 못하면 어쩌나.
불의에 항거하는 민주 시위의 반복이 바로 한국 현대사였다. 그리고 그러한 거국적 시위의 원점은 4·19다. 실로 대단한 시위였다. 정치적 발언을 삼가던 시인 김춘수마저도 이렇게 노래했을 정도다. “죄없는 그대들은 가고/ 잔인한 달 4월에/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이/ 메아리 되어/ 겨레의 가슴에 징을 치는 것을,(‘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나? 불의에 찬 폭력이 문제였다. “마침내 총으로 겨냥하여/ 정의와 생명을 쏘고// 조국의 기에/ 검은 손으로 피 묻히던/ 4월 19일(김남조 ‘기적의 탑을’).” 기만으로 가득한 부정부패가 문제였다. “가난과 싸우며 정성껏 바친 우리들의 세금이/ ‘도금한 애국자’들에게 횡령당함을 거부한다(김용호 ‘해마다 사월이 오면’).” 도덕의 실추가 문제였다. “‘민족’과 ‘조국’의 이름으로 기만을 일삼는/ 정상배와 아첨의 무리는 송두리째 뿌리를 뽑아야 한다(김용호 ‘해마다 사월이 오면’).” 언어의 타락이 문제였다.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란 궤변도/ ‘가죽잠바’도 그렇다/ 겨레를 좀먹는 어휘들랑 없어져야 한다(김용호, ‘해마다 사월이 오면’).”

4·19는 단지 폭력에, 불의에, 기만에, 부정부패에, 부도덕에, 언어 타락에 저항한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 역사를 새롭게 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작가 최인훈은 ‘세계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세계인’은 1960년대 작성된 글로 추정되며, 현재 〈유토피아의 꿈(최인훈 전집 11)〉(문학과지성사)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날 한국의 자유가 탄생하였다.” 아니, 4·19에서 한국의 자유가 탄생하다니, 그러면 8·15 해방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8·15야말로 식민지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진 날이 아니었던가? 물론 최인훈도 8·15의 의의를 잘 알고 있다. “1945년의 그날 우리는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 위대한 날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으나,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8·15 해방은 한국인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은 존재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패망이라는 “사건”은 외부로부터 왔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다. 최인훈은 한탄한다. “해방은 마땅히 애국자들이 거느리는 독립군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어야 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모든 일을 망쳐버렸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자신들이 조국을 해방시킨 것처럼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이다. “해외에서 돌아온 ‘지사’들은 변하지 않은 조국에의 향수는 두둑히 가지고 왔으나, 한 가지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해방시킨 조국에나 돌아온 듯이 잘못 알았다. 그들은 개선한 것이 아니요, 다만 귀국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중요하다. 8·15 해방을 자력에 의한 승리의 서사 속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타력에 의한 선물의 서사 속에서 이해할 것인가. 두 경우 각기 할 일이 다르다. 전자의 경우 승리의 여세를 몰아 일을 지속해나가면 되지만, 후자의 경우 거의 모든 것을 백지에서 시작해야 한다. 최인훈이 보기에 한국의 상황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킨 미국은 정작 어떠했나. “미군정이 현실로 취한 여러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거의 아무 준비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군정은 별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뜰하게 살필 생각이 당연히(?) 없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적 정권을 만든다’는 방향만은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 뜻도 없다. 한국의 어느 층과 손을 잡을 것이며 어떤 속도로, 어떤 입장에서 한다는 계획 없이 그저 ‘민주주의적 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는 말 이상으로 무의미한 말이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는 공허한 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한국이 공산화되도록 미군정이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대한 정책은 전후 뚜렷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난 대소 관계의 양상이 이루어짐에 따라서 비로소 구체화되었다. ‘민주화’란 의미는 ‘반공’과 같은 말이 되었다.” 즉 미국조차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반공 이상으로는 별생각이 없었다. 문제를 악화시킨 것은 민주주의를 반공으로 이해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제대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차라리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하지. 그랬다면 민주주의에 대해 좀 더 숙고할 수 있었을 텐데. 자유,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같이 현대 한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강력한 언어들이 실질적으로는 반공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 사태가 오고 만 것이다.
최인훈이 보기에 이승만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태를 가장 잘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반공을 뜻한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안 사람이기 때문에 정권을 얻었다. 역사는 역사의 뜻을 아는 사람에게 자리를 준다. 이승만 정권은 민주주의를 위한 정권이기에 앞서 반공을 위한 정권이었으며, 그러므로 빨갱이를 잡기 위해 고등계 형사를 등용하는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흥미로운 이유는 독립운동의 업적과 식민지의 유산과 왕조의 잔영을 모두 구현하는 인물이었다는 데 있다. 그는 실로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식민지 통치 유산의 계승자였으며, 스스로 조선 왕족의 연장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러한 사태는 영원할 수 없었고 결국 4월의 그날이 왔다. “식민지 관료와 고등계 형사와 왕조적 노인의 트리오가 튕겨내는 이상한 불협화음은 악의 포화점에 이르고 말았다. 그리하여 저 4월의 그날이 왔다.” 4·19가 폭력에, 불의에, 기만에, 부정부패에, 부도덕에, 언어의 타락에 저항한 쾌거라는 점에 누가 이의를 달 수 있을까. 그런데 최인훈이 보기에 4·19는 그 이상이다. “그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날 한국의 자유가 탄생하였다. 그날 한국의 전통이 탄생하였다. 그날 모든 것이 비롯하였다. 그날의 주인공이 완전히 젊은 세대였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상징적인가. 그날 우리는 우리가 된 것이다.”
8·15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타인이 우리에게 준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4·19는 다르다. 그것은 미국이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소련이 시켜서 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생적인 사태였다.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된 것이다. 그날 우리는 우리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래서 최인훈은 그날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자유가 탄생했다고 말한 것이다. 반공과는 다른 그 자유민주주의는 4·19에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공산주의는 선택지가 아니었나? 미국이 그 선택지를 배제해서? 그렇다 해도 왜 한국은 그 배제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공산주의는 신화로서가 아니라 엄연한 역사로서 처음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희생은 컸으나 교훈은 절대적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무엇을 뜻하는가가 아니라,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보았다. 우리는 처음으로 뚜렷한 적을 가졌다. 누가 무어라든 인제 공산주의는 남한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6·25로 인해 그리고 북한의 상황으로 인해 공산주의는 더 이상 대안으로 기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공산주의 리부트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4·19에서 자유를, 민주주의를,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수께끼는 왜 최인훈이 4·19를 두고 “그날 한국의 전통이 탄생하였다”라고 말하느냐는 것이다. 전통과 혁명은 어딜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 아닌가. 자유와 전통은 함께 거론되기에 어색한 짝이 아닌가. 정신적 고향 없이는 무엇도 지속될 수 없기에 최인훈은 우리가 돌아갈 정신적 고향의 소재를 묻는다. 4·19는 각성이되, 각성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지속을 위해서는 정신적 고향이 필요하다. “이 모든 나라들의 경우는 그들의 정치적 각성을 밑받침해줄 정신적 고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종교든 종족적 정치 이념이든.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정신의 고향은 어디일까?” 최인훈은 이렇게 묻고서 곧바로 대답한다. “나는 여기서 눈앞이 캄캄해진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적 고향’ 없이는···
왜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일제 통치의 최대 죄악은 민족의 기억을 말살해버린 데 있다. 전통은 연속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중허리를 잘리면 다시 잇기가 그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 전통을 유지하면서 서구를 배울 수 있은 일본의 행운과는 달리 우리는 정치적인 패배와 더불어 정신적 유산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최인훈은 눈이 캄캄해진다는 가장 강력한 좌절의 표현을 정신적 고향에 두고 사용한다. 정신적 고향이야말로 진짜 승부처이기 때문에.4·19에 한국인은 거리로 뛰쳐나가 불의의 타파를 부르짖었지만, 정신적 고향 없이는 더 진전할 수 없다. 때려 부술 수는 있지만 건설할 수는 없다. 타파만큼 어려운 것이 건설이다. 타파보다 더 어려운 것이 건설이다. 정신적 고향 없이 건설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우리 유산의 재고 조사를 실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최인훈은 정신적 유산의 재고 조사를 실시한다. “서양 문명은 기독교 신학의 다양한 변주곡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에 상응하는 종교 전통이 한국에 있는가? 최인훈은 대답한다. “생각건대 한국인은 종교적인 국민이 아니다. 혹은 역설 같지만 너무나 너무나 종교적인지도 모른다. 유태 민족과 같은 신앙을 못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렇고, 국회의원이 무당을 찾아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요컨대 한국인에게 만연한 종교는 대체로 일종의 기복신앙. 최인훈이 보기에 그것은 문명의 기초가 될 수 없다.
기복신앙뿐일까. 한국 역사에는 심오한 불교철학이나 이른바 실학 전통 같은 것도 있지 않은가. 최인훈은 대답한다. “불교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는 쉽다. 실학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세계는 지금 아주 달라졌다. 문화권들이 서로 자기 완결적으로 폐쇄된 상태에 있던 옛 시대에는 정신적 자각은 논리적으로 전통에의 회귀를 의미했으나, 지금 20세기에 사는 우리의 경우,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가령 우리들의 정신적 원형이 불교에 가깝다는 것이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과제가 곧 불교에의 회귀로 결론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열린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전통으로 그저 돌아갈 수 없다. 그 전통이 한때 유의미했을지 몰라도 그 유의미했던 세계는 이제 무의미해졌다. 그 세계는 인간 소외를 당연시하던 신분사회이자 국지적인 세계에 불과하다. 한국인은 이제 열린 세계 속에 살고 있다. 현대인의 과제는 많은 것들이 닫혀 있는 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세계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목표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도 아니며, 불교도가 되는 것도 아니며 마르크시스트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세계인’이 되는 일이다.”
세계인이란 곧 인간 그 자체다. “아직도 우리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석굴암이나 백마강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나는 두려워한다. 우리가 겨우 빠져나온 인간 소외의 심연 속으로 발목을 끌어당기는 듯한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또 한 번 헛다리를 짚을 것이다.” 마치 마르크스가 공산사회 이전은 인간의 전사(前史)에 불과했다고 말했듯이, 세계인이 되기 이전은 인간의 전사에 불과하다고 최인훈은 규정한다.
그렇다면 여지껏 한국인은 인간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 최인훈이 보기에 한국인 대부분은 어엿한 인간, 즉 정치 주체였던 적이 없다. 한국인 대부분은 수동적인 피치자가 아니었나. 한국인은 노비로 일하거나 노비를 부리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그들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결국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4·19의 주체들은 다르다. “4월의 아이들은 인생을 살기를 원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그들과 더불어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기’가 되고자 결심한 인간. 정치로부터의 소외를 행동으로 극복한 인간만이 살 자격이 있으며 저 위대한 서양인들과 어깨를 겨누고 ‘세계인’이 될 힘을 가졌다.” 4월이 정신적 고향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서양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단지 우리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것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세계인이 될 수 있나?불교나 실학 같은 것으로도 안 된다며? 그러면 서양의 기독교 전통을 따르면 되나? 아니다. “만일 기독교를 우리들 회향(回鄕)의 자리로 선택한다면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꼭 2000년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신적 유산이란 어느 날 갑자기 남의 것을 수입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그것이 자신이 처한 사회 속에 녹아들 때 비로소 정신적 유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겨난다. 그러니 세계인이 되자는 최인훈의 주장은 우리를 서양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전통화와 서양화가 모두 답이 아니라면, 한국인은 도대체 어떻게 세계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세계인이란 아직껏 있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미래의 인종이며 새 시대의 신화족이다.” 즉 세계인은 미래에 있다. 미래에 있다니, 그렇다면 당장 우리 앞에는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이제 4·19가 있다. “우리들이 앞으로 의지할 정신적 지주는 석굴암 속이 아니라 저 4월의 함성 속에 있다. (···) 4월은 인간이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고향이 되었다. 그것은 신라보다 오래고 고구려보다 강하다. 인간의 고향이기 때문에 오래고 오래며 자유의 대열이기 때문에 강하다.” 4·19야말로 고유 전통이나 서양 문명도 아닌 그저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이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고향도 아니고, 서양인이 되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고향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고향이다.

누군가 반문할지 모른다. 아니, 한국의 과거가 그렇게 텅 비었나. 보편적일 수 있는 자원이 그토록 없단 말인가. 나름대로 빛나는 정신적 유산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최인훈이 보기에 한국의 과거 전통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 그래서 말한다. “그래서 회향이지만 그 돌아갈 고향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그것을 호오(好惡)를 기준 삼아 얘기하라면 불교라고 말하겠으나 거기에는 불타(佛陀)의 키보다 큰 조건부로서만 그렇다. 그 조건들이 낱낱이 허락될 것인지를 나는 의심한다.” 여기서 최인훈은 자신이 불교를 좋아한다는 속마음을 내비친다. 그가 좋아하는 불교는 우리의 정신적 고향이 되면 안 되나? 최인훈은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단언하는 대신 최인훈은 이렇게 말한다. “불타(佛陀)의 키보다 큰 조건부로서만 그렇다.”
즉 현대 한국인이 불타의 키보다 클 때, 불교를 숭배한다기보다는 불교를 자신의 정신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을 때, 그 정도로 전통을 잘 재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전통은 현대 한국인의 전통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과거 전통이 훌륭하다고 강변해서 될 일은 아니다.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어쩌구 하지 말라.” 자본주의 맹아가 옛날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해서 될 일은 아니다. 인간 존중 사상이 면면히 흘러왔다고 주장해서 될 일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토인들의 부메랑처럼 자동적으로 돌아갈 전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자동적으로”이다. 전통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자동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전통보다 “키가 클 때” 비로소 돌아갈 수 있다. 관건은 전통 그 자체가 아니라 전통을 대하는 우리의 키다. “중요한 일은 우리가 전통을 검토하는 것은 그곳에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빨리 떠나기 위해서다.” 오로지 전통보다 키가 큰 사람만이 전통으로 돌아가되 전통에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다. 잡아먹히지 않고 다시 떠날 수 있다.
그러면 현대 한국인의 키는 그만큼 큰가? 아니다. 크지 않다. “불타의 키보다 큰 조건부로서만 그렇다. 그 조건들이 낱낱이 허락될 것인지를 나는 의심한다.” 최인훈은 전통을 현대의 정신적 고향으로 다룰 만한 역량이 한국인에게 아직 없다고 본다. “전통이라는 이름 밑에서 비겁한 후퇴를 말자.” 전통에 대해 애착을 갖는 것이나, 전통을 혐오하는 것이나, 전통을 섣불리 서양 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하는 것은 모두 전통을 제대로 다룰 역량이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 역량이 없기에 전통은 아직 현대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남은 것은 4·19뿐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지금 당장에 때 묻지 않은 피부로 우리를 안아주는 저 4월의 가슴을 나는 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로 향한 폭파구였다.4월의 아이들의 그 상긋한 겨드랑 냄새를 나는 좋아한다. 그 핏발 서지 않은, 그러면서 흑보석처럼 타던 눈동자를. 사랑한다. 그들이 보여준 보편성을 나는 사랑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한 것은 “차라리”라는 표현이다. 최인훈은 4·19를 무조건 두 팔 벌려 환영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환영해버린 것이다. 4·19는 정신적 유산이 없는 상태에서 생겨버린 “세계로 향한 폭파구”였다. 정신적 유산이 없으니 그것은 이 사회에 착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4·19의 한계를 최인훈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인훈은 4·19를 전통의 만개가 아니라, 전통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전통의 만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4·19를 뒷받침할 정신적 유산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이 없기에 “차라리” 4·19를 전통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최인훈의 통절한 “차라리”
그러나 전통은 누적을 의미하는 법. 이제 갓 발발한 4·19는 그 시점에서 전통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굳이 4·19를 전통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장의 관점이 아니라 먼 미래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4·19로 시작된 어떤 흐름이 지속되어 나가다 보면, 먼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4·19를 돌아보며 좋은 전통의 시작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만해 한용운 역시 〈님의 침묵〉에 실린 ‘독자에게’라는 글에서 보다 나은 먼 미래를 상상한 적이 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용운이 희망한 미래는 슬프지 않은 시대여서 슬픈 시대에 쓰인 자기 시 같은 것은 지난 계절의 마른 꽃 대하듯이 하기를 바란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인훈은 좋은 날들이 지속되어 미래에 이르게 되면 4·19는 전통의 시작이 되리라고 전망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지 않은 그 아름다운 미래를 선취하고 싶어서 4·19를 굳이 전통이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의 전통은 미래의 저 어둡고 그러나 화려한 지평의 저편에 있다. 우리는 미래를 선취한다. 세계인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심장을 향하여 말하라. ‘오라 그대, 나의 잔인한 연인 나의 미래여’라고.” 이것은 불행한 과거를 가진 이가 희망찬 미래를 자기 것으로 당장 전유하려는 새로운 시간관이다.
이승만 정권을 거꾸러뜨린 이후 과제는 분명해졌다. 4·19를 전통으로 만들 만큼 훌륭한 흐름을 앞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전통을 탐욕스럽게 반추하고 그것을 미련 없이 뱉아버릴 탄력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렵다.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전통을 과잉 찬양하느라 바빠서 전통을 제대로 반추하지 못할 수 있다. 외국 문물의 매혹에 빠져 전통을 과잉 혐오하기 바빠서 전통을 제대로 반추하지 못할 수 있다. 전통을 제대로 반추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전통을 재해석하여 현대 한국으로 이르는 새로운 서사를 써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전까지는 일단 “차라리” 4월을 선택한다.
그 이후 한국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차라리” 4월을 선택한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4월을 선택한 결과, 우리는 정치적 각성이라는 눈부신 성취를 얻었다. “우리는 현대가 정치의 계절임을 안다. 식민지 인텔리의 불행한 의식은 정치를 곧 악으로 동일시하는 슬픈 타성을 길러왔다. 정치는 악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 그것은 태양이 현실인 것처럼 인간의 현실이다. 눈을 감으면 태양은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정치는 그 사이에 당신의 목에 올가미를 씌운다. 정치적 권리를 방어하려는 자각을 갖지 못한 인간에게는 미래가 없다. 정치적 차원에서 표현되지 못한 휴머니즘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정치적 각성에 관한 한, 현대 한국은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다. 정당성이 결여된 정권이 수립될 때마다, 부당한 정치가 심화될 때마다 한국인은 분연히 일어서 거리로 나아갔다. 그런 면에서 현대 한국인은 갈 데 없이 4·19의 자식이다.
동시에 한국인은 “차라리” 4월을 선택한 대가를 치러왔다. 시위만으로는 자유와 평등과 민주가 일상의 현실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반복해서 거리로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반복되는 시위는 성취이자 한계이다. 폭력에, 불의에, 기만에, 부정부패에, 부도덕에, 언어 타락에 저항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폭력이 빈발하지 않고, 불의가 창궐하지 않고, 기만이 판치지 않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지 않고, 부도덕이 잠식하지 않고, 언어가 타락하지 않은 생활세계를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결국 4·19는 자유와 평등과 민주가 뿌리내린 생활세계 전통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위라는 전통을 시작한 셈이 되었다. 최인훈이 보기에 8·15가 아니라 4·19야말로 해방이요, 건국이었건만 어쩌면 4·19조차 해방이나 건국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자유와 평등과 민주가 뿌리내린 생활세계가 올 때까지 여전히 한국인은 투쟁 중이다.
최인훈이 4·19를 전통의 시작으로 간주했을 때, 프랑스혁명이 몇 년 주기로 일어나는 것을 희망한 것이 아니다. 불의에 항거하는 시위의 영구 반복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시위가 불필요해질 만큼 바람직한 사회를 기대한 것이다. 시민들이 집결했지만 문제의 뿌리를 보지 못했기에 몇 년 뒤 다시 모여야 하는 일. 이것은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반복하는 일에 불과하다. 트랙에 달리기를 하기 위해 모였는데, 반복되는 부정 출발에 의해 계속 다시 출발선에 의해 서야 한다면, 선수들은 지쳐가기 시작한다.
이 모든 성취와 한계는, “차라리” 4월을 선택한 데서 온다. “차라리”라는 말에는 끝내 채우지 못한 결핍의 감각이 통절하게 배어 있다. 한국인은 정신적 고향 없이 시작한 신생아이자 고아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복되는 시위를 넘어, 끊임없는 불안을 넘어, 바람직한 가치가 뿌리 내린 현대의 생활세계를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정신적 고향이 필수적이다. 20세기의 한국인 최인훈은 정신적 고향이 부재하는 데서 오는 결핍을 의식하면서도 “차라리” 4월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21세기의 한국인은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다. 최인훈이 의식했지만 채 찾지 못했던 정신적 고향을 창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최인훈은 “지적 호기심에 불타고 자중할 줄 알고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선을 행하려는 정열을 간직하고 시야가 넓으며, 전통을 탐욕스럽게 반추하고 그것을 미련 없이 뱉아버릴 탄력성을 가진 지적 엘리트”를 기대했다. “지적 호기심”이라니, 이것은 지성인 예찬인가?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지성인 예찬은 아니다. “4월의 아이들은 달려간 아이들이다. 그들은 생각하면서 달려간 것이 아니요, 달리면서 생각한 새로운 종자였다.” 이것은 누워서 생각하는 지성이 아니라 달리면서 생각하는 지성이다.
“지적 엘리트”라니, 이것은 엘리트주의인가?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엘리트주의는 아니다. “우리가 뜻하는 지적 엘리트란, 선택하고 싸우고 모험하고, 겸허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인간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그러한 사람들이다.” 즉 대중영합주의의 포로가 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최인훈이 말하는 진정한 지적 엘리트다. 그들은 “신분으로 고정된 계급”이 아니다.
“4월의 아이들은 달려간 아이들이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선을 행하려는 정열”을 간직하라니, 이것은 행동주의인가?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행동주의는 아니다. “자중할 줄 알고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선을 행하려는 정열”을 간직하라고 했으니, 무조건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중할 줄 알면서” “시야가 넓으며” “탄력성을 가진” 행동주의를 촉구하는 것이다. 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달리면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세대론인가.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세대론은 아니다. “구태여 나이를 기준한 세대론을 말할 생각은 없다. 늙은 아이들도 있으며 젊은 노인들도 있다. 영혼의 자유는 호르몬의 분비량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하고 싸우고 모험하고, 겸허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현역이다.
이것은 현대화론인가?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현대화론은 아니다. 현대를 그저 찬양하기에는 최인훈은 전통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감각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을 도외시하거나 전통을 단순화하지 말고, 반추하기를 바란다. 그것도 “전통을 탐욕스럽게 반추”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전통론인가?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전통론은 아니다. 전통을 그저 찬양하기에는 지금은 현대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감각하고 있다. 전통을 제대로 모르고는 전통으로부터 떠날 수조차도 없다. 초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초월할 현실을 잘 알아야 하듯, 전통을 떨치고 전위에 서기 위해서는 전통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전통을 탐욕스럽게 반추하고 그것을 미련 없이 뱉아버릴 탄력성”이 필요하다. 전통을 경유하되 거기에 포로가 되지 않는 영혼이야말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만약 오늘날 한국 사회에, 대중 영합주의나 신분화된 엘리트주의나 행동하지 않는 지성이나, 행동밖에 모르는 지성이나, 자유를 꿈꾸지 않는 무기력이나, 고답적인 전통주의나, 무반성적인 현대화론이 팽배하다면, 최인훈이 ‘세계인’에서 피력한 기대는 모두 좌절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포기해야 할까. 마치 이런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듯, 최인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희망은 역사 속에도 인간에게도 조국에도 물론 신에게도 없다. 당신이 만일 희망이 있기를 원한다면 거기 희망이 있다.”
이것은 중국의 낙후된 상황에 좌절했던 노신(魯迅)이 단편소설 ‘고향’에서 한 말과 통한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희망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그러한 희망은 공상과는 다르다. 최인훈은 “솔직하게 사태를 직면하고 상황의 뜻을 자각하여 그 개선을 향해서 노력하자는 각오”를 강조했다. 그러한 각오만 있다면 비관도 낙관일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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