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평화를 바라는가? [콘텐츠의 순간들]

2023년 5월31일 새벽이 아직도 생생하다. 휴대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려대기에 살펴보니, “경계경보 발령”이라는 재난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대피하라는 것인가. 가족들을 깨워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고 가방을 챙겼지만, 머릿속은 혼란과 공포로 새하얘진 상태였다. 20분 후, 경계경보가 오발령되었다는 재난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날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 한가운데에 있는 휴전 국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단 하루, 단 한 번 들은 사이렌 소리도 그토록 공포스러웠는데, 그런 사이렌 소리가 매일 매시 울려대는 곳에 사는 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얼마 전에 본 뉴스에서는 미국에서 이란에 투하했다는 미사일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비행기가 미사일을 떨어뜨리는 영상 뒤로 이스라엘과 이란, 가자지구의 모습이 차례로 비쳤는데 곳곳이 사이렌 소리로 가득했다. 사방이 전쟁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얼마 전 조 사코의 만화 〈팔레스타인〉(휴머니스트)의 개정판이 출간됐다. 만화 배경은 1990년대 초반의 팔레스타인으로, 제1차 인티파다를 조명하고 있다. 제1차 인티파다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일어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규모 민중 시위를 뜻한다. 저널리스트 조 사코가 팔레스타인에 직접 들어가 인티파다 현장을 취재한 뒤 내놓은 작품이 바로 〈팔레스타인〉이다. 책에는 작가가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총상을 무려 다섯 군데나 입은 팔레스타인 청년, 아들들이 모두 이스라엘 군인에게 살해당한 할머니, 유일한 생계 수단이던 올리브나무를 강압에 따라 자기 손으로 벌목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만났다. 이스라엘인 나오미와 폴라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린 우리 식대로 살고 싶을 뿐이에요. 아시겠어요? (···) 우린 노상 그 문제만 생각하고 살 순 없어요. 이젠 그런 이야기 듣는 것도 지겨워요.”
나오미와 폴라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발포하기 전 반드시 경고하고, 그 이후 발포할 때도 생명에 지장이 없도록 다리에 먼저 총을 쏜다는 수칙도 알려주었다. 조 사코가 팔레스타인에 머무르던 몇 개월 동안 보고 들은 바는 그 이야기와 달랐다. 그가 사람들에게 듣거나 거리에서 목격한 장면은 군인들이 다짜고짜 시장통에 들어와 시장 상인들의 뺨을 후려치고, 누군가를 무작위로 잡아가고, 없는 사실을 스스로 자백할 때까지 감옥에서 고문을 일삼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문밖으로 상황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민 이를 향해 총을 쏘고, 병원에 쳐들어와 수술 직전의 환자를 도로 잡아가고, 병원에서 의사들을 모두 내보내 위급한 환자들의 치료를 지연시키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이 1980~1990년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참극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팔레스타인〉이 그린 장면들은 오래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인 지금이다. 아니, 지금은 지난 30년 전보다도 더 잔혹한 폭력이 이어지고 있다. 가자지구에 대한 연이은 공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배급로가 차단된 탓에 기근과 영양실조에 시달리다 죽어가는 이들도 태반이다. 조 사코는 개정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시점에 〈팔레스타인〉 개정판을 내는 일은 그다지 축하할 만하지 않다. 이 책은 한편으로 세부 사항에서 시간에 뒤떨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반적인 구도에서 슬플 만큼 적절하기도 하다. 아직도 적절한 까닭은 여기서 읽게 될 팔레스타인 점령의 모든 면면이 아직도 진행 중이어서, 아니 더 급박하고 더 난폭하게 그러고 있어서이다.” 그의 말마따나, 이 개정판의 출간이 너무나 ‘적절해서’ 슬프고 괴롭다.
미국 국방부와 계약하는 AI 기업들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2021년엔 미얀마 내전이, 2022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2023년부터 격화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날로 심해지며 인권 파괴도 심각하게 이어지고 있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의 통계에 따르면, 이주를 시도하다가 사망한 난민의 수마저 해마다 급증했다. 2020년 4302명이던 사망자가 2021년에는 6201명, 2022년에는 7141명, 2023년에는 8565명으로 늘어났다. 3년 만에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수치다.
일부 지도자들의 야욕과 정치적 결정 때문에 수많은 이들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있다. 게다가 최신 기술을 가진 기업들까지 여기에 동조하는 추세다. 챗지피티를 선보인 오픈AI는 미국 국방부와 2억 달러에 이르는 계약을 체결했고, 클로드를 보유한 앤스로픽은 미국 국방부와 정보기관을 위한 모델을 별도로 개발하여 제공했다. AI는 이전에도 전쟁에 혁혁한 기여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기술이 집대성한 전쟁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혹한지를 우리가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중이다.
〈팔레스타인〉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조 사코는 버스에서 한 유대인 여성을 만난다. 이스라엘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던 그 여성은 조 사코가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사양한다는 손짓을 하며 “나는 그저 평화를 바랄 뿐이에요”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들으며 조 사코는 이렇게 독백한다. ‘네, 네. 누가 평화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평화라는 것은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게 아니죠. 그리고 누구나 평화의 이름으로 같은 것을 바라지도 않죠···.’ 그의 독백은 ‘평화를 바랄 뿐’이라는 말 뒤에 숨은 이들이 폭력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전쟁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그들의 평화란, 그저 옆에 탄 승객과 말싸움하지 않고 조용히 목적지까지 도착하길 바라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평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평화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이스라엘, 이란, 미국, 가자지구와 멀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전쟁터에 놓여 있지 않은 건 아니다. 우리 역시 휴전 국가이며,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각종 무기가 그곳에서 누군가의 삶을 짓밟는 데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무기 수출국이기도 하다. 마침 비영리단체 ‘전쟁없는세상’에서 시위 진압 및 고문 도구 수출을 저지하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서 차근차근 평화를 세워나가자. 부디 우리가 바라는 평화가 같은 모습이기를 희망한다.
조경숙 (만화 평론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