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채웠던 꿈이 엎어졌을 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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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앙증맞은 잔이 있다.
훌륭한 '찻잔'이 되기 위해 성실히 훈련해 온.
이제 낯선 존재의 방문은 잔을 확장하는 기회가 된다.
마침내, 잔은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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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앙증맞은 잔이 있다. 훌륭한 ‘찻잔’이 되기 위해 성실히 훈련해 온. 짧은 인생이나마 완전히 헌납해 온. 제법 능숙하게 따뜻한 홍차와 각설탕을 담아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던 어느 오후, 잔은 불의의 사고를 겪고 만다. 커다란 검은 새가 잔을 물어다 낯선 풀숲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차라리 깨졌다면 나았을까. 산산조각 난 꿈이 더 아프다. “잔은 자신이 더는 자신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서글픈 마음으로 하염없이 시간만 흘려보냈어요.”
방향을 상실하고 한없이 침잠하던 날들. 빗물이 들어찬 잔에 작은 물고기가 놀러 오지만, 잔은 이 방문을 모욕이라 여긴다. “나는 찻잔인데!”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꽃잎 한장이 우연히 잔에 내려앉고, 꽃향기가 잔을 은은히 감싸자, 우중충한 마음에 다시 생기가 돈다.
이제 낯선 존재의 방문은 잔을 확장하는 기회가 된다. “어느 날 잔은 토끼를 하룻밤 재워 주었습니다. (…) (나비들이) 수다 떠는 데 자리를 내어주기도 했고요.” 잔은 아늑한 침대도 되고, 소담한 벤치도 된다. 마침내, 잔은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존재가 된다. 달을 품은 잔. 밤하늘에 뜬 환한 보름달이, 잔에 드리운 것이다. 이 황홀한 모습을 보러 고양이와 토끼, 다람쥐가 모여든다. “모두가 달을 들여다보러 찾아왔어요. 마침내 잔은 수줍은 듯이 웃었습니다.”
나를 채워왔던 꿈이 엎어지는 일은 사실은 ‘보통의 시련’이다. 어릴 때 진로(발레, 축구, 공부…)를 정하고 한 우물을 파는 게 성공의 법칙으로 여겨지는 한국에서는 더 그렇다. 특정 시점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부모의 뜻에 따라 아이의 진로가 바뀌는 일들이 적잖다. 부상이나 경제적 상황 때문에 더는 특정 진로를 고집할 수 없게 되는 일도 많다. 아이로서는 한평생을 바친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사건이기에, 이때는 어떤 위로도 응원도 먹히지 않을 때가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그럴 때를 대비한 예방주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부모는 존재가 엎어지는 경험을 한 아이가 새로운 무언가를 스스로 품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줘야 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책에도 잔이 처음 꽃잎을 느끼기까지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음이 은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아이는 특정한 무언가가 되어야만 내가 되는 것이 아님을 천천히 알아갈 것이다. 내가 꿈을 품는 것이지, 꿈이 나를 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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