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詩티즌 리포트-마음의 단상] 밀가루의 도시와 나

충청투데이 2025. 7. 1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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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우 시인
변선우 시인 

봄에 꽃잎이 흩날릴 때면, 여름에 빗발이 흩뿌릴 때면, 가을에 낙엽이 떨어질 때면, 겨울에 눈발이 몰아칠 때면, 나는 꼭 밀가루가 떠오른다. 특히 올해 3월, 느닷없이 쏟아지던 눈을 보며 밀가루가 이 도마동을, 대전을 뒤덮는 상상을 했다. 이 글은 당시 적어 놓은 메모를 토대로 하여 쓰였음을 밝힌다.

*
3월도 되고 하였으니, 꽃이 피고 더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예감과 달리, 눈이 내리고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다. 특히 펑펑 쏟아지는 눈에 적잖게 당황하였다.

눈은 땅을 향해 쏟아지면서도 허방에서 흩날렸다. 그러니까 허방은 계속하여 빽빽해지고 있었다. 마치 허방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허방은 무연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또 눈은 내리며 거듭 쌓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켜켜이, 얼룩덜룩한 지상을 감추려는 것처럼 소복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지상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죄와 부끄러움 덮으려는 듯 분주해 보였다.

그리하여 내가 바라보는 풍경에서는 눈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게 되었다.

눈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성질을 지녔다. 그토록 새하얀데, 도통 속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흩날릴 땐 한없이 애처롭다가, 서로 응결하면 튼튼해지는 눈. 그래서 마음처럼, 각오처럼 던지면 아프거나, 밟으면 미끄러지기도 했던 게 아닐까.

눈은 이렇듯 변화무쌍하고, 자신의 외연을 자유로이 변신하기도 하는 기묘한 존재라는 생각.

그런데 나는 내리던 눈을 보며 밀가루가 떠올랐다. 눈은 밀가루와 흡사한 측면이 많다. 눈은 곧잘 흩날리지만, 서로 엉겨 붙거나 뭉쳤을 때 단단해지는데, 또 새로이 뭉쳐 또 다른 형상들 만들어낼 수 있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요컨대 눈오리, 눈사람, 눈 벽과 눈 집 등.

밀가루 또한 마찬가지이다. 흩날릴 땐 맥없어 보이지만, 그것에 물을 보태 뭉쳐보면 거듭난다. 그것은 보드라우면서도 무겁고 단단해지는 것이다. 반죽한 밀가루를 갈라 보면, 빼곡하게 차 있는 속에 놀라기도 한다. 또 밀가루는 빵으로도, 면으로도 전개될 수가 있는 변화무쌍한 사물이다.

특히나 대전과 빵, 칼국수는 뗄 수 없다. 대전에 밀가루 음식이 많은 이유에 관한 여러 설(說)이 존재하는데, 아무쪼록 모든 이야기는 대전과 밀가루가 뗄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로 귀결한다. 그러므로 표표히 흩날리면서도, 묵묵히 쌓이는 눈을 보며 밀가루가 떠올랐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까.

밀가루는 대전 사람인 나와 태생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물이라는 생각. 내가 그토록 쉽게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이윽고 씩씩하고자 노력하던 것은 기질적으로 밀가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다른 이들의 입김에 쉽게 흩어지던 나. 그러나 수습하고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나.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나를 일으키고 반죽하고 계시는 것은 또 아니었을까.

(아마도) 평생 살게 될 나의 고향 대전에서 밀가루와 같은 태도로, 어쩌면 밀가루의 증인으로 살아갈지 모르겠다는 기묘한 예감. 나는 말이야, 밀가루의 축복을 받은 어느 심심한 도시의 심심한 동네에서 말이야, 물론 무너지기도 하지만 단단해지기도 하며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증언하리라는 예감. 이윽고 쫀득해지고 탱글해지기도 하는 밀가루의 입술 얻어 나의 삶을 내내 반추해야겠다는 다짐.

눈 가운데 서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나에게 쌓이는 눈을 상상해본다. 추워지지 않고 더워지는 나, 비로소 깨끗해지는 나를 가늠해본다.

어느새 눈앞에 밀가루가 흩날리고 있다. 꽃잎도, 낙엽도, 빗발이나 눈발도 아닌 온전한 밀가루가 풍경을 거듭 뒤바꾸며 뒤덮는다. 나는 어지러워지다 또렷해진다. 두 발 딛고 있는, 흩날리는 이 밀가루의 도시 어느 복판에서, 나로써 살아내고 있다는 믿음. 이로써 무사한 나.

[변선우 시인]
- 1993년 대전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하였다. 시집으로 『비세계』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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