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인간', 사유의 속도를 되찾다…디지털 시대에 다시 손글씨를 말하다

곽성일 기자 2025. 7. 1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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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 종이가 만든 문명의 진화…느림의 사고가 창의력과 기억력에 미친 영향 조명
다빈치부터 뉴턴, 코폴라까지 ‘쓰기 인간’들의 기록…디지털 시대 사유의 본질을 되묻다
쓰는 인간 표지.
"쓰는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다."

문명을 움직여 온 건 언어였지만, 그것을 구체화한 건 바로 '쓰기'였다. 디지털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오늘, 손에 펜을 쥐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이 낡은 행위가 오히려 가장 혁신적인 힘이었음을 상기시키는 책이 출간됐다. 종이문화사 연구자 롤런드 앨런이 펴낸 『쓰는 인간』(상상스퀘어)은, 단순한 도구로 치부되던 필기의 본질을 탐구하며 인류의 정신과 문명이 어떻게 글쓰기와 함께 진화해왔는지를 추적한다.

△손 글씨는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 무엇을 잃고 있는가

애인의 생일을 앞두고 오랜만에 손 편지를 쓰며 글씨가 예전 같지 않음을 실감한 적 있는가. 타자와 터치 입력에 익숙해진 손은 더 이상 미세한 획을 그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단순한 운동감각의 퇴화에 그치지 않는다. 『쓰는 인간』은 '쓰기'라는 행위가 뇌의 작동방식, 창의력, 기억력, 감정의 깊이까지 바꿔놓는 강력한 인간 행위라는 점을 다면적으로 설명한다.

롤런드 앨런은 역사 속 인물들의 필기 습관을 따라가며 종이에 적는 '느림의 사고'가 어떤 방식으로 사고의 구조를 만들어내는지를 증명해 나간다. "쓰는 것은 생각을 체화하는 일"이며, "글씨를 쓰는 동안 우리는 말보다 먼저 사고하고, 타인보다 먼저 자신과 대화한다"고 그는 말한다.

△문명과 자본주의를 만든 종이, 그리고 장부

책은 특히 종이가 인류 사회 구조에 미친 경제적 영향에도 주목한다. 양피지가 지배하던 중세, 상인들은 거래 장부를 고가의 가죽 위에 적었다. 이는 내용의 위·변조가 가능했고, 신뢰의 기반이 취약했다. 하지만 종이의 등장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잉크가 스며드는 종이는 수정이 어렵고, 페이지를 묶어 쪽수를 매기면 장부 조작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는 곧 위임과 분업을 가능하게 했고, 신뢰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거래 시스템이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쓰기 기반의 신뢰 체계'는 종이의 물리적 특성과 직결된 결과다. 종이는 단순히 기록을 남기는 도구를 넘어, 인간 사회를 조직화하고 확장시키는 구조적 장치였던 것이다.

△다빈치, 뉴턴, 코폴라… 손으로 적은 사유의 유산들

책에는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쓰기 인간'들의 사례가 빼곡히 담겼다.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년에 무려 1,000쪽 가까운 노트를 써내려갔다. '거울 글씨'로 좌우를 뒤바꾸어 적은 글, 소용돌이와 파동을 따라 그린 물의 움직임, 그리고 해부학을 위한 시신 해부까지. 다빈치에게 노트는 사유의 실험장이자, 감각의 확장 도구였다. 어떤 노트에는 무려 730개의 그림과 67개의 단어가 '물'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조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아이작 뉴턴의 10대 시절 노트에도 눈길이 간다. 두 펜스를 주고 산 작은 노트에는 유리 자르는 법, 흑사병 치료제, 수학 문제 풀이까지 범위를 넘나드는 지식이 담겼고, 그의 후속 학문적 도약을 예고했다. 케임브리지 입학 후 쓴 노트는 '불같은 성격'과 지적 고집까지 드러낸다.

현대의 예도 흥미롭다. 영화 의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학생 시절 연극 대본의 제본을 풀어 여백을 넓히고, 여기에 장면, 조명, 동선, 감정선 등을 손글씨로 빼곡히 메모했다. 그만의 '프롬프트 북'은 단순한 연출 계획이 아닌, 창작의 실험실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에 더 빛나는 필기의 힘

『쓰는 인간』은 최근의 뇌과학, 인지심리학 연구들도 소개한다. 실시간 강의에서 노트북으로 타이핑한 학생보다 펜으로 필기한 학생들의 정보 이해와 기억 유지가 더 뛰어나다는 결과는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타이핑은 '받아쓰기'가 되기 쉽지만, 손 필기는 개념을 요약하고 구조화하는 과정 자체가 사고력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스크린 위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문장을 보지만, 백지 위에서는 멈추고 질문하게 된다."

쓰기란 곧 생각을 붙잡는 행위이고, 손으로 적는다는 것은 사유를 외부화하는 행위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쓰기야말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기록의 시대, 쓰는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 도구가 범람하는 시대. 그런데도 종이 노트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 이유를 『쓰는 인간』은 이렇게 정리한다.

"마음속 생각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종이와 펜은, 그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보상은 놀랄 만한 통찰일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아날로그를 찬미하는 고전주의적 서술이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속도에 피로를 느끼는 현대인에게 '생각의 느림'이 얼마나 창의적일 수 있는지를 역설하는 일종의 철학적 선언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펜을 들게 만들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페이지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 책은, 단순한 인문서가 아닌 시대를 건너는 하나의 '쓰기의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