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호남 근대교육의 발상지 …담양 창흥학교 뒷얘기들(하)

선명완 2025. 7. 10.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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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학박사 김삼순의 묘. 담양 대전면 평장리 병풍산 자락에 있다. 이번 기고를 하면서 처음으로 발굴하여 소개하게 되었다. 진입로나 표지판이 없어 접근이 어렵다.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 김삼순

적막함이 방향을 잡고 나아가면 바람이 되는 경우가 있다.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 불굴의 여인 김삼순(金三純, 1909~2001) 생애도 이와 같다. 창평을 넘어 호남이 배출한 근대 여성 중 가장 독보적인 활동과 업적을 남긴 그녀를 우리는 왜 외면했던 것일까. 우리의 관심은 왜 그녀에게 인색했던 것일까.

창흥학교는 1919년부터 여학생의 입학을 처음으로 허용했다. 3명 모두 당시 창평의 유지였던 김재희(金在曦)의 딸들이었다. (김삼순의 비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김재희의 '희' 한자는 晞가 아닌 曦이다.) 김재희는 1924년~1929년까지 제3대 창평면장을 지내기도 했던 천석꾼 지주였다고 알려졌다.

그는 신지식과 근대교육,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창흥학교(창평공립보통학교) 여학생 입학과 여학생반 개설을 요구하면서 거액의 기부금을 출연하였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딸들에게 입학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전통적 사고와 관행을 넘어선 매우 이례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김이순, 삼순, 사순 자매들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김사순(金四純, 1911~2005)은 전 국무총리 이회창의 어머니이며, 김삼순은 바로 손 위 자매이다.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이순(二純)은 그 위일 터이다. 이순의 행적은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삼순이 퇴임 이후 고향에 머물 때 종종 찾아와 우애를 나누었다고 한다. 일순(一純)은 어렸을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삼순이 마지막 생애를 바치며 버섯 연구에 몰두하였던 삼성농장과 연구소(담양군 금성면 담양온천 인근)

김재희의 자녀 3남 4녀 중 장남이 김홍용(金洪鏞, 1902~1950)이다. 창흥공립보통학교 출신으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공부한 후 돌아와 면장을 하다가 담양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한국전쟁 와중에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2남 문용(汶鏞, 1916~1995)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형의 지역구에서 보궐선거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3남 성용(星鏞, 1918~1999)은 도쿄제국대학을 거쳐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두루 관직생활을 하면서 6, 7, 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재희의 자녀들이 모두 천주교 신자인 걸로 봐서 김재희도 일찍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신앙적 배경이 신교육과 여성교육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창흥학교 첫 여성 입학생이자 졸업생의 한 명인 김삼순(金三純, 1909~2001)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를 거쳐 1928년 19세의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먼저 일본 유학 경험이 있었던 큰오빠 김홍용의 길잡이와 지지 덕분이었다. 4년제 학교인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일본 최초의 여자 사범학교로서 현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이하 도쿄여고사)의 청강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김삼순이 진학한 이과는 2학년까지는 동물과 식물 등 자연과학에 대한 전반적 개론 강의가 편성되었고, 3~4학년 때는 화학, 물리학, 수학, 생물학 등으로 전공을 선택하는 학제였다. 김삼순은 화학과 물리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한편 1928년 4월 김삼순을 비롯 도쿄여고사에 입학한 조선인 여성은 모두 4명이었다. 괄호의 내용은 국내 출신학교, 전공, 졸업 연도이다. 김삼순(경성여고보, 이과, 1933.3.), 백정진(경성여고보, 보육실습과, 1929.3.), 장애희(張愛希, ○○고등여학교, 가사과, 1932.3. 전 수도여고 교사), 장화순(배화여고보, 문과, 1932.3.) 등이 그들이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시절 20대 초반의 김삼순

도쿄여고사 신입생 시절 김삼순은 일본 여성 세 번째 이학박사인 가토 세치(加藤 セチ, 1893~1989, 가토 가문의 마지막) 박사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녀 역시 도쿄여교사 출신으로서 모교에 돌아와 후배들을 향한 특강이었다.

강의의 내용도 내용이었거니와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된 선배의 모습은 김삼순에게 학문의 목표는 물론 인생의 뚜렷한 길잡이가 되었다. 자신도 꼭 박사가 되어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학업에 몰두하였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본래 청강생이었던 김삼순은 1933년에 정식 입학생의 자격을 주는 선과생(選科生)으로 졸업을 하였다.
1982년 <주간여성> 표지 인물로 소개된 김삼순

학교를 졸업하고 2년의 교원 의무 복무 기한을 채우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진명여고보를 거쳐 모교인 경성여고보에서 학생들에게 화학과 수학, 주산 등을 가르쳤다.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그녀의 향학열은 그치지 않았다. 과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열망과 박사학위를 향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1938년 돌연 사직서를 낸다. 사범학교가 아닌 본격적 연구를 위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집안에서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혼기가 이미 지났기에 부모는 학업보다는 결혼과 가정을 선택해주기를 바랬다. 이 과정에서 김삼순의 어머니는 최초의 이학(화학)박사인 시숙 이태규(李泰圭, 1902~1992, 이회창의 둘째 백부)의 설득으로 일본 유학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태규는 삼순이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자신이 반드시 혼인을 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1~1943년 일본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부 식물학과를 졸업하여 이학사를 취득하였다.

국내로 돌아온 1945년 부모의 간절한 설득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철학박사가 된 강세형(姜世馨, 1899~1960)이었다.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강세형은 지역구에서 무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동국대에서 철학을 강의하기도 한 인물이다.

이후 서울대 사대 생물학과 교수(1946~1948)가 되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를 지속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혼란과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상황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담양에 머물던 국회의원 오빠 김홍용의 피살은 물론 집안 살림이 모두 불타버렸기에 가계가 급격히 기울었다. 그녀의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1960년 남편이 사망하자 3번째로 일본에 건너가 연구를 이어가기로 했다. 1961년 10월 자신이 공부했던 홋카이도대학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그곳에는 더 이상 그의 연구를 도와줄 지도교수가 없었다. 1963년 규슈대 농학부로 옮겨 도미타 기이치 교수의 생물물리연구실 연구생이 되었다. 주된 연구 주제는 녹말을 당으로 분해하는 촉매 효소인 아밀라아제 일종인 '타카 아밀라아제(taka-amylase) A'에 관한 것이었다.

마침내 도미타 교수와 공동으로 1965년 세계적인 과학 전문지 『Nature』에 2편의 논문 발표하였다. 이어 1966년 규슈대학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생물물리학 농학박사를 취득했다. 당시 일본의 아사히신문에서 '한국 여성이 농학 박사, 체류 연장 7번의 맹공부'라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할 정도였다.

또한 그녀의 『Nature』에 게재된 논문과 박사학위 논문(<高아미라제 A의 광불활성화 반응>)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외국 20여 개의 학술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귀국 후 서울여대에서 식품영양학과를 설립하여 초대 교수(1968~1975) 등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독보적인 균학(菌學) 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특히 버섯 연구에 몰두하였다. 우리가 식용하는 느타리버섯은 오로지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균학회 초대~2대 회장, 여성 최초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퇴임 후인 1978년 고향 인근 담양군 금성면에 삼성농장(三城農場)과 취원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설립하여 실천적 연구를 거듭하다가 2001년 별세하였다.

#느타리버섯은 삼순버섯

동명이인이 등장하는 드라마도 있지만, 창평이 낳은 세계적 연구자 김삼순의 생애에 대해 추가적인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겠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식용하는 느타리버섯은 자연에서는 늦은 가을 일정 기간에만 서식하고 채취할 수 있었다.

계절이 늦은 가을이라서 '늦달이 버섯'이었다. 일본에서 종균을 가져와 국내에서 처음으로 배양과 인공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4계절 내내 식용할 수 있도록 대중화시켰고 농가의 소득 증대에 절대적 기여를 한 인물이 김삼순이다.

따라서 그녀가 남긴 불굴의 향학열과 버섯의 상용화에 바친 연구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서라도 느타리버섯은 '삼순버섯'으로도 불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김삼순의 묘소가 있다는 '평장리 산 32번지'가 손바닥일 것 같지만 임야의 필지는 범위가 다르다. 며칠 동안 더위 속에서 묻고 또 물으며 산을 쏘다녔지만 헛되었다.

마음 다잡고 이른 아침부터 다시 오른 병풍산 자락, 대숲을 헤치고 작은 계곡을 지나 다음 발길을 찾아 잠시 고개를 든 찰라 11시 방향에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달려가 확인을 하니, '농학박사 성지(聲至) 김해김씨삼순지묘(카타리나)'였다.

반가운 마음에 풀을 뜯어다 낙엽 쌓인 상석을 쓸고, 무성히 자란 초목을 훔쳐 뽑고, 재배를 올렸다. 봉문을 다독여드렸다. 비석을 한참 동안 안아드렸다. 입비는 2007년 5월 16일에 이루어졌으며, 비문은 조카인 승국(金承國)이 찬하였다. 전설로만 듣던 그녀를 이곳에서 이렇게 직접 만나고 인사드릴 수 있다니, 감동이었다.

학교와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한 골목이 끝나면 또 다른 골목이 시작된다. 이 시대를 앞선 선각 지식인 춘강 김정주, 그에 의해 주도된 호남교육의 발상지 창평의 창흥학교와 주변 이야기를 여기서 마치도록 하자. 골목을 벗어나 이제 다시 광장이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 소장
선명완 소장